위의 사진은 1928년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이당 김은호 (1892 ~ 1979)가, 그때껏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이왕직의 주문으로 새로 이모해 그려내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 후, 이왕직에서는 당시껏 전국 각지의 진전(眞殿)과 각 궁궐의 전각들에 퍼져 남아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 대부분을 새로 한 곳에 모으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해 3월 22일, 새로이 창덕궁 북편에 기존의 선원전을 대체할 새 전각을 새로 짓고 이 건물도 역시 선원전이라 이름붙였다. 그 날을 기해 궁궐을 비롯한 각지에 흩어져있던 어진들은 이 새 전각에 봉안되었다.
창덕궁 신선원전. 1921년 건립.
1921년 당시까지 남아있던 역대 임금의 어진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많지 못해서, 기존의 창덕궁 선원전에 모셔져있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효명세자), 헌종의 어진과, 서울 영희전에 있다가 일찍이 궁으로 모셔온 세조와 원종(정원군)의 어진, 그리고 궁궐의 다른 전각들에 모셨다가 다시 모셔온 철종과 고종의 어진 뿐이었다.
물론 민간에서는 무속인들의 신당이나 사찰에 모셔진 왕이나 왕족의 진영들이 더러 있었으나, 오랫동안 민간의 필력 없는 민속화가들에 의해 수 차례의 개채 과정을 거치는 바람에 원형을 상고하기는커녕 아주 터무니없어보이는 그림들이 되어버렸다. 몇 해전 세상을 잠시 떠들썩하게 했던 해인사의 세조 어진이라 알려진 그림이 이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이 밖에 조선 왕가의 족보, "선원보감"에 실려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목판본 삽화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덕궁의 어진을 보고 그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졸렬하고 조잡한데다 현존하는 몇 안되는 어진과 맞추어보면 복식이나 용안의 모습조차 터무니없이 달라 어진의 참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것이라 믿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다.
선원보감에 실린 세조 초상 목판화.
위의 사진속 그림과 비교해 보면, 사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러던 1928년, 두 해 전에 승하한 순종의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하게 될 시점이 다가왔다. 이왕직에서는 이미 1922년에 한번 순종의 생시 초상을 그려냈었던 김은호에게 다시 한 번 순종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주문했다. 물론, 1922년에 그렸던 서양식 복색을 한 모습이 아니라, 왕가의 옛 법도대로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은 예스런 모습의 초상이었다. 그와 함께 이왕직에서는 김은호에게, 서울 영희전에 있다가 모셔온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새롭게 이모해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 두 그림은 영조 때인 1735년에 어명에 의해 기존의 원본에서 모사된 그림들로, 원본이 소실된 후로도 어떻게 겨우겨우 긴 세월동안 내려온 유일본이었다.
위 사진의 확대 - 세조 어진의 전체적 모습을 대강은 파악할 수 있다.
세조는 호피문으로 보이는 바닥 깔개 위에 놓은 작은 어탑에 앉아있고,
흰 색의 신발, 즉 백피화를 신고 있는데,
이것은 세조 어진의 모습을 묘사한 몇가지 문헌사료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어째서 이왕직이나 당시의 그 누구도 역대 임금의 어진들을 사진에 담아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가이다. 함흥의 준원전과 개성 목청전에 봉안되었던 태조 어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어진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단 한번도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 아마도 이왕직에서 일하던 옛 대신들이나 당시의 이왕가 측에서 모종의 거부나 압력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훗날 역대 조선 왕조 임금들의 모습을 영원히 역사의 미궁속에 몰아넣는 짓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이 때 모사되었던 세조와 원종의 어진들을 포함한 다른 옛 어진들은 그 후 해방을 맞이할 때 까지 계속 남아있었고, 그 후 한국전쟁 때에도 북한군의 약탈을 피해 다른 조선 왕실의 유물과 국립박물관 유물과 함께 무사히 임시수도 부산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1954년 12월 26일, 어진과 다른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던 부산 관재청 창고가 부산 용두동 대화재 와중에 대부분 재로 화하는 대 참변이 터지고 말았고, 이 때 살아남은 것은 겨우 영조의 어진 두 점, 불에 절반 이상 타버린 철종의 어진, 얼굴을 비롯해 그림 대부분이 몽땅 다 타버린 태조와 문조의 어진, 그리고 어디서 떨어져나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타다만 단편들 뿐이다.
용두동 대화재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1954년 12월 26일.
이 밖에도 그림은 그럭저럭 온전히 남았지만 정작 귀퉁이의 화제가 다 타버려 누구를 그린 그림인지 알지 못하는 그림도 두어 점 더 있는데, 이것들은 복색을 보아 영조의 연잉군 시절 모습 어진처럼 역대 임금의 왕자 시절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 정작 주인공이 누구인가는 전혀 알 수 없이 미궁에 빠져있다. 이들 그림들로 미루어보아 선원전에는 왕들의 공식 어진들 뿐 아니라 왕족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도 더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것도 더는 확인할 수 없는 역사의 수수께끼일 뿐이다.
1954년의 화재를 겪은 후의 문조 (익종, 효명세자)의 어진 잔편
그런데 오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지다, 여지껏 다른 어떤 원사료나 관련 서적에서도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소한 발견 하나를 하게 되었다. 196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서 발견한 작은 기사 한 토막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는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에 관련한 자료를 찾으려고 검색했던 신문이었는데, 박동진 명창의 1969년 춘향가 완창 무대 예고기사 바로 위에 실린 이 기사, "세종대왕의 용안 - 어진화가 김은호 씨는 말한다"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사진자료 하나가 있었다. 기사 자체는 1960년대 이래 박정희 정권 하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표준영정"과 동상들 가운데 그 무렵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새로 건립된 김경승 作의 세종대왕 동상의 고증에 관해 다룬 것이다.
김은호는 여기서 세종대왕의 얼굴에 풍성한 수염을 묘사한 김경승의 동상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세종은 수염이 많이 옅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그 근거로 자신이 1928년 당시 작업했었던 세조의 어진에 거의 수염이 없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아들인 세조의 얼굴과 역시 수염이 성근 편인 태조의 얼굴처럼 세종의 얼굴도 그닥 수염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저 증언대로였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할 말은 없었겠지만, 놀랍게도 이 기사에는 이런 사진이 실려있다.
신문 기사의 사진이라 해상도가 매우 떨어지는 것이 아쉽지만, 처음에 소개한 저 흐릿한 사진 속 모습이나 선원보감의 조잡한 그림, 또는 해인사에 소장된 개채 투성이의 그림에 비하면 훨씬 제대로 그려지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모습이다. 역대의 어진 화사들이 기존 어진을 이모할때는 화가 개인의 필력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림의 원래 모양새와 화필을 고스란히 살려 그렸음은 이미 많은 미술사가들의 연구로 잘 증명된 바이다. 이 그림 역시, 1928년 당시 김은호가 역대 어진화사들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1735년에 원본에서 이모된 옛 세조 어진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진이 1969년 신문 기사에 실렸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1969년 당시까지는 김은호나 또는 누군가의 손에, 1928년 당시 김은호가 어진을 그릴 때 사용했던 유지 초본이나 최소한 그 사진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부족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그림의 현재 행방은 확인하지 못했다.
김은호는 1979년 타계했다. 그의 유작들과 유품 상당수는 개인에게 매각되었고, 일부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 등등의 사설 기관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1978년에 당시 알려진 김은호의 작품 상당수를 모은 화집을 출간했지만, 이 화집에는 세조어진 초본은 들어있지 않다. 참고로, 김은호가 1922년에 그렸던 대례복 차림의 순종어진 초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이 혹여 고려대학교 박물관이나 혹은 다른 공기관에서 소장하고 있지만 무관심이나 무지로 공개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 작품들보다도 더더욱 작품의 행방이나 제반 연구가 오리무중인 것이 근현대 한국미술사인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세조어진 초본, 최소한 그 사진이라도, 부디 누군가의 손에 있다가 우리 앞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 왕조 임금의 초상화로서 가지는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존작이 거의 전무한 조선 전기 초상화의 필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일 것임은 말할 것도 없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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