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다시 나츠메님께 바치는 조공입니다. 1940년 3월호 "삼천리"지에 실린 현영섭 (1907 ~ 1964?)의 논설문, "내선일체와 조선인의 개성문제"입니다.
이전에 다른 포스팅에서 이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기도 헀었습니다만, 내선일체에 대해 1940년대 초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줄 독특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현영섭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위키피디아 한국어 항목에 소상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8%84%EC%98%81%EC%84%AD)
이 글은 사실 현영섭의 대표적인 저술인 1938년의 논설집 "朝鮮人の進むべき道"의 서문과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거나 유사한 부분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 그 글을 다시 손 본 듯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에서도 서비스 되고 있지만, 국편위 한국사DB의 잡지 원문은 대개 한자어를 모조리 한글로 고치거나 틀린 부분이 있어 저는 원 소스에서 옮겨 적었습니다.
「內鮮一體」와 朝鮮人의 個性問題
玄永燮
一.半島 統治의 最高 首腦部를 비롯하여 過去에 日本의 立場을 反對해 온 半島 知識階級들도 多少의 異論은 있으나 內鮮一體論에 對하여 肯定하고 實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內鮮一體의 觀念이 明確히 全 民衆에 把握되어 있는 現象이냐하면 그렇다고 斷言하기는 아직 早急하다. 原則的으로 一體論에 贊成하면서도 現實 問題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意見이 생기는 것이 現狀이다. 그 뿐만 아니라 一體論을 冷笑하는 사람도 없다고는 할 수 없는 現狀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內鮮一體 內의 朝鮮 民衆的 諸問題를 考察하기 前에 內鮮一體의 根本 原理를 確立하는 것이 가장 必要하다고 생각한다. 根本 原理에 대한 認識의 差異로부터 具體的 現實 問題에 대하여 異見이 續出한다고 나는 본다.
內鮮一體의 根本 原理에 대하여 대개 두 가지로 認識한다고 分類할 수 있다. 즉 하나는 內鮮은 兩 民族인 까닭에 皇道를 生活 原理로 하여, 즉 異體同心으로 團結 握手하면 그만이라는 論이다. 半島 知識階級의 대부분, 東亞協同體論者, 東亞聯盟論者의 대부분이 이러한 內鮮一體를 主張하고 있으며, 또 그들의 發表한 國家觀, 世界觀을 展開시키면 協和的 內鮮一體가 되는 것이다. 友情的, 握手形의 內鮮이라고 命名한다. 이와 反對로 內鮮一體論의 有力한 지도자인 南 總督은 內鮮의 窮局의 姿態는 握手가 아니라 血, 形, 身魂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宣言하였다 (昭和 14年 5月 30日, 精動役員會 席上 講演). 나는 南 總督의 意見을 絶對로 支持한다. 그 지지하는 이유는 나의 世界觀, 人生觀에서 出發한다. 或者는 「너의 意見은 主觀的인 願望的 結論이지 何等에 客觀性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公式主義的이라 아니할 수 없다. 一 個人의 思想이란 決코 全體를 떠나서 生長하지 아니한다. 徹底一體論을 主張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幾多의 現實의 蓄積을 나는 充實히 表現하는 곳에 나의 主觀性과 客觀性이 있는 것이다.
왜 나는 徹底一體論을 주장하는가. 半島 知識階級의 大部分이 協和的 內鮮一體論者라고 나는 생각하는 까닭에 이 기회에 內鮮一體에 대한 所見을 簡單히 發表하려 한다.나는 各 個人, 各 家庭, 各 村落의 個性, 各 道, 各 省, 各 縣의 個性을 尊重한다. 個性을 尊重하는 哲學을 10年間이나 信奉하고 微力하나마 實踐하여 왔었다. 民族의 個性도 역시 尊重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이 個性이냐 하는 점에 들어가면 대단히 難處하다. 가령 志賀直哉의 소설 一頁와 有島武郞의 소설 一頁을 비교하여 兩者의 文章的 個性을 分別하기는 困難하다. 李光洙의 一頁, 李箕永의 一頁를 보고 곧 兩者의 文學的 個性을 말하기 어렵다. 물론 志賀, 有島, 李光洙, 李箕永는 個性을 가진 것이다. 思想的으로나 文章的으로나 個性을 가진 것은 事實이다. 그런데 여기에 文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小說을 읽힌다면, 「그 소리가 그 소리지 무엇 별 다른 것이 있나」할 것이다. 個性이란 이와 같이 薄弱한 것이다. 文學을 모르고도 넉넉히 生을 圖謀하고 사는 實業家가 있는 것은 이 世上에 얼마나 個性이 없고 生存 즉 性慾과 食慾을 滿足시키는 類型的 存在가 많다는 것을 證明하고도 남는다. 文學, 藝術, 이것이야말로 眞實한 個性의 세계다. 이것의 存在가 얼마나 蔑視되는지는 現 世界를 想像하여도 現代에 있어서 個性이 얼마나 薄弱한 존재인 것을 가히 想像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徹底한 個性尊重論者이다. 音樂의 調和란 同一한 音에서 나오지 아니한다. 모든 사람이 論語만 읽고 武器를 잡는 사람도, 그림 그리는 사람도 없는 國家나 社會는 滅亡하고야 만다. 最高로 發達된 理想의 나라는 個性의 最高의 發達이 全體를 破壞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交響樂團이 成立하려면 여러가지 樂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樂團員이 一齊히 「탁시-도」를 입고 指揮者의 命에 服從하고 同一한 樂譜를 사용한다는 것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個性的이면서도 統制的인 것이 交響樂의 本質이다. 藝術, 文學이 自由스럽게, 個性的으로 보이나 其實은 束縛, 拘束에 얽매여 있다. 卽 人生의 法則, 社會, 國家의 制弱 밑에 있다는 것은 明白한 事實이다. 나는 徹底한 統制論者다. 自由와 統制는 車의 兩輪과 같다.
二.
以上과 같이 個性을 보는 것은 常式이지만, 이것은 人類 社會에도 말할 수 있다. 世界가 現代와 같이 相爭하는 것은 蜜蜂이나 개미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全 世界의 各 民族이 自己 個性만 第一이라고 主張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뺀드」의 樂器가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것과 같다. 交響樂을 演奏할 적에 一部의 樂記는 休奏하는 수도 있다. 人類 社會는 제멋대로 날 뛰고 있다. 指揮棒을 싫어하는 樂人이며 共通한 樂譜가 없는 音樂家다.
이러한 バラバラ를 싫어하는 傾向도 상당히 强烈한 것이 있다. 基督의 理想이 무엇인가. 舊敎의 法王이란 무엇인가. 秦始皇은, 「나포레옹」은 무엇인가. 佛敎는 무엇이며, 社會主義는 무엇인가. 民族, 國境을 超越하여 가지고 同一한 理想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赤露에서는 「共産主義란 全 世界, 全 宇宙에 미치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천박한 唯物史觀에는 共産主義를 가지고도 全 世界를 統一하려고 한다. 基督敎가 全世界를 統一하려고 하나, 그것을 實行할 現實的 基盤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각국 資本主義에 충성하는 歐米 基督敎가 世界 統一한다는 것은 空想이다. 파시즘은 자기 나라만 위하는 국가 個人主義이니 이러한 것은 世界的으로는 發展 아니한다. 世界統一의 理想은 共産主義와 日本 皇道思想 뿐이다. 英國도 世界를 統一하려고 하나, 日本 때문에, 獨伊蘇 때문에 실패하였다. 共産主義의 誤謬를 解說한다는 것은 나의 論題에서 너무 떨어지므로 생략한다.日本精神이란 결코 民族主義가 아니라, 基督敎와 동일계통인 神 중심의 신앙이라. 신의 상징이옵신 天皇을 崇拜仰慕하고 天皇의 「오미고고로」(大御心)에 副奉하도록 우리들의 생활을 건설하자는 사상이다. 그런 까닭에 內地人이라 하여도 天皇 御慕心이 없는 사람이면 日本人이 아니다. 希臘人의 Lafcadio Hearn이란 西洋人도 天皇에 귀의하였다. 그는 훌륭한 日本人으로서 生涯를 마쳤다. 大和 민족은 天皇에 歸依한 民族이라. 朝鮮人은 지금 大和 民族과 같이 全世界의 民衆에게 天皇 仰慕의 宗敎(나는 日本精神은 宗敎라고 생각한다)를 宣傳하는 地位에 있다고 생각한다. 內鮮一體의 근본 정신은 그것이다. 朝鮮人인 民族主義를 청산하고 共産主義적 世界 統一 思想을 버렸다면 最後의 길은 日本精神에 의한 世界 秩序 創造 運動에 賣盡할 뿐이다.
三.이와 같은 遠大한 思想에 있어 半島人의 任務, 役割을 繪像할 적에 비로소 우리들의 個性 問題에 대한 態度가 決定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神 中心의 世界 一家의 理想鄕을 建設하려면 될 수 있는대로 各國의 理想이 同一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南米같이 同一 民族 系統이 亂立하여 多數한 國家를 建設하여서는 아니된다. 暴力, 强制가 아니고 理想共鳴에 依한 國家의 合同이 緊要한 條件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 國家가 완전히 一 國家를 形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理想鄕 建設의 模範이라고 할 수 있다. 各 民族이 協和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一心同體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人類가 바라고 바라는 것이다.
支那 民族은 永遠히 日本 民族과 同化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民族 精神을 感傷的, 封建的 殘存物이라고 斷定한다. 漢族이나 半島人의 祖先의 피가 日本民族에 다수 混入하여 있는 것을 무엇으로 證明하려는가. 이 僅少한 先例는 모든 例가 되고 만다. 半島人은 完全한 日本民族이 될 수 있고, 또 全 世界의 民族이 一 民族, 一 國家를 形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現代의 空想이지만 人類가 神信仰을 徹底히 할 때 반드시 實現하고야 만다. 一 大家族으로서의 인류, Genus Humanum이 成立할 때가 있다. 八紜一宇의 神勅이 그것이다.
이 未來 世界를 實現하려는 마음이 熾熱하면 熾熱할수록 우리들은 우리들의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個性에 固執하여서는 아니된다. 桂貞植 氏의 「바이오린」에 무슨 朝鮮語가 있으며 金仁承 氏의 그림에 무슨 朝鮮語가 있느냐. 桂씨나 金씨가 全 世界의 音樂隊, 美術家가 하지 못하는 技術을 發揮할 때 거기에 金씨, 桂씨의 개성이 생기고, 桂씨, 金씨의 계통이 있다면 半島의 個性이 發揮된다. 그리고 이것은 훌륭한 日本人으로서의 個性이다. 三越, 丁子屋에 수입하는 半島人의 士女가 商品을 購入할 적에 무슨 朝鮮 말이 있는가. 朝鮮 옷감을 끊을 때에 個性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國語를 사용하여도 가능하다. 나는 和信에 가서도 朝鮮의 個性보다도 全世界 共通한 무엇을 發見한다. 個性을 너무 찾으면 疲勞할 뿐이다. 「비빔밥」을 「骨董飯」이라 하여도 좋고 「まザ御飯」이라고 하여도 좋다. 「まぜ御飯吳れ」라고 말하고 먹으면 비빔밥의 맛이 없어지는가.
國語를 獎勵하고 장래 朝鮮語가 없어저도 半島人의 個性은 조금도 滅却되지 아니한다. 時調의 기분은 우리들이 日本詩歌의 一派로서 國語로 更生시킬 것이다. 愛蘭문학은 大部分이 英語가 아닌가. 同一한 言語를 가지고도 그들은 分離하려고 한다. 「스코트란드」는 英國에 忠誠하며 英語를 使用하면서 「스코트란드」를 자랑한다. 이 地方主義는 人類를 破壞하지 아니한다. 人類 社會를 破壞하려 하는 것은 愛蘭같은 政治的 獨立 運動이다.
東洋 全體는 日本의 指導를 받고 日本語는 東洋의 共通語가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子孫에게 幼年부터 日本語를 교수하여 本能的으로 習得시켜 놓는 것이 必要하다. 半島人은 滿洲國人이나, 支那人보담도 日本精神을 自覺하고 實踐하고 있으므로 장래 日本精神의 世界 進出의 第 二陣의 任務를 맡게 되는 까닭에 그 責任도 重大한 것이 있다. 言語가 아니라 半島人의 獨特한 技術이 우리들의 個性이 된다. 風習, 家族 制度까지도 決코 重要한 個性이 아니다. 內地人, 滿洲人 등이 하지 못하는 技術, 思想만이 우리들의 자랑할 만할 個性이다. 三字의 姓名이나 同姓不婚이 모두 다 漢文化의 模倣에 不過한 것은 半島 儒敎文化가 漢文化의 模倣에 불과한 것과 같다. 世界에 없는 기계, 世界에 둘도 없는 思想, 藝術을 創造할 적에 비로소 個性이 발휘된다.
半島의 儒敎적 家族制度 보다도 神道와 西洋 文化의 綜合에서 改革된 內地의 家族制度를 半島의 家族制度로 장래의 世界語가 될 日本語를 日常語로 使用하는 것은 一代 進步다. 過去만 보고 未來의 幸福을 모르는 사람은 反對하라. 現代를 未來에 도래할 人類의 理想 社會에 될 수 있는 대로 接近시켜 가지고 解釋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어찌하여 基督이나 佛陀의 生命이 現在까지 尊屬하고 모든 政治的 英雄의 末路가 妄覺의 世界에 滅亡되고 마는가. 唯物史觀論者가 嘲笑할 人類의 根本 生命 (四海同胞思想이 그것이다)을 把握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勝利하는 것이다. 半島人이 자기의 表面的인, 一時的인 個性에 집착하여 영원의 세계를 잊는다면 그것은 平凡한 民族으로 종사되고 만일, 표면적 개성을 解脫 揚棄하여 영원한 個性을 위하여 싸워 나간다면 半島人의 將來는 希望과 光明과 勝利의 그것이다.
四.
朝鮮人이 內地人과 接近하며 文化를 交換하고 肉體的으로 結婚함으로서 內鮮의 血統은 점차 單一化한다. 內地人은 동일한 혈통이 아니라 다수의 民族이 混合一體가 된 것이다. 朝鮮人은 내지인과 장래 同一한 政治 經濟를 營爲한다 가정한다면 內鮮 구별이 없는 일대 민족이 형성된다. 세계에 가장 우수한 新日本民族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 방향을 內鮮一民族化, 日支一民族化, 日支印一民族化, 그 다음에 亞歐一民族의 세계 일가의 국가로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亞歐의 세계가 不二의 것으로 본다. 世界는 하나다. 全世界가 一民族이 되어야만 한다.
半島人의 文化는 大部分은 漢文化요, 나머지 文化는 日本의 神道 문화와 同一 繼統인 純朝鮮文化 (巫覡文化)다. 이 朝鮮 文化는 도저히 世界的 文化가 되지 아니한다. 朝鮮人이 永遠한 生存을 希望한다면 東西洋의 모든 文化를 吸取 統一한 日本 文化를 自己 文化로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儒敎와 神道만 가지고는 日本 국민의 完全無缺한 자격이 없다. 西洋의 技術, 科學의 文化, 佛敎, 基督敎의 宗敎, 즉 全世界 文化의 一切을 統合 攝取하여야만 眞實한 의미의 日本 國民의 資格을 가지게 된다.
현대 日本은 全世界 文化를 종합하여 新文化를 創造하려고 한다. 文化 創造에 半島人은 參加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神道는 新文化 創造의 精神的 態度인 까닭에 利害體驗이 필요하나 동시에 東西洋의 文化 一切을 吸取할 의무가 半島人에게 있다. 儒敎의 復興 보담도 기계 문명에 精通함이 현 단계에 가장 필요하다. 神道적 體驗과 동시에 物質 制御의 方法 技術을 硏磨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내가 半島人의 表面的 個性(言語, 習慣, 其他의 文化)을 揚棄하라 하는 것은 日本 文化에서 世界性, 優秀性을 본 까닭이며, 이 문화를 우리들 自身의 것으로 만들려면 日本 문화의 表面的에 있는 存在를 爲先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이다. 西園寺公 이하의 明治의 先覺者들은 洋服을 입고 西洋 文化를 공부하였다. 洋服은 그 簡易性에 있어서 勞動에 便한 까닭에 日本服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나 西洋 文化의 일면은 가장 상징한다. 日本 여자의 衣服이 색채는 日本 문화의 綜合性을 상징한다. 朝鮮 女子 衣服은 간단한 노동복이 되는 까닭에 內地人도 使用하리라고 믿지만 半島人이 世界性을 가지려면 豊富한 色彩 使用이 필요하다. 和服의 女子服은 모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남자의 和服은 그다지 세계성을 뛰우지 못하였다. 浴衣나 남자 和服을 입는 것은 偶然性이다. 親愛하는 內地人의 愛用하는 것을 우리도 愛用하자는 데 불과하다. 朝鮮의 女子 衣服과 內地의 女子 衣裳은 世界的 發展性이 있다. 朝鮮 男子의 衣服, 內地 男子의 衣服은 몰락하고 만다. 世界가 統一하여 理想 社會가 온다면 復活할는지 모른다.
半島人의 가장 微妙한 感情을 日本語로 表現 못한다면 우리들은 永遠히 不幸하다. 그 感情을 朝鮮人만 아는 藝術로 즉 朝鮮語로 표현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國語로 表現하여 全世界의 心情을 훑을 필요가 있다. 日常 生活에 國語 常用하라는 것은 그것을 意味한다. 許蘭雪軒의 시는 漢文으로 표현한 까닭에 半島人의 個性을 明과 日本에 전하였다. 東洋의 共通語인 日本語를 日常語로 하여 七千萬의 內地 同胞, 全 東洋民族에게 半島人의 個性을 보이며 그 個性에 相當한 地位를 얻자. 그것은 世界性을 띈 日本人이 되는 것이며 우리들의 才能, 誠意, 眞實에 相應한 地位를 獲得하게 됨을 意味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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