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 옛 집의 운명에 대해.......(주의; 스크롤 압박!) by 진성당거사

한옥을 위한 悲歌...."한옥 지키려다 실명한 영국인" 기사를 읽고..

꽤 오래 전에 저 글을 써서 무려 과분하게도 이오공감에 추천이 됐었다. 글재주라고는 통 엉망이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저 정도의 관심과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글 뒷 부분에 베델 옛 집에 대해 한마디로 짧게 코멘트를 쓴 부분이 있었는데, 이 포스팅에는 베델의 옛 집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한 코멘트를 적어보려고 한다.


(* 처음에 이 곳 위치를 시사IN 편집국이 들어선 부귀빌딩 자리로 알았는데, 밑에 덧글로 달아두신 지적도 있고 해서 부동산 지적도 등을 통해 찾아보니 제가 잘못된 내용을 썼군요. 기억에만 의존하다 보니 착오를 일으킨 모양입니다. 이 부분은 다시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후에 시간이 되면 다시 현장 답사를 한 후에 다시 내용을 보완하겠습니다. 잘못된 내용을 쓰게 되어 잘못된 정보를 알게 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 10-03-24 추가) 


내가 아래 사진을 찍었던 2002년 5월까지, 그 옛 집은 옛 모습을 그런대로 유지하며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해 남짓 지나서, '교남뉴타운' 운운하며 이 일대의 오래된 집들이 마구잡이로 헐려나가던 때 이 집도 덩달아 끝장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003년 9월, 이 집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리소문없이 철거되었다.


2002년 5월 당시의 베델 옛 집 모습.
필카로 찍은 사진을 예전에 어거지로 폰카로 찍어놓은 사진이라 화질이 좀 안좋다.

내가 이 사진을 찍었을 무렵, 이 집은 종로 북부 일대의 여느 평범한 낡은 집들이 다 그랬듯이, 미색 페인트를 칠한 허름한 시멘트 담장에 초록색 철 대문이 달린, 그리고 바로 옆 길가에서는 그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내판, 명판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사실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이 집이 베델의 옛 집이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고, 그저 특이한 형태의 절충형 한옥이라고만 생각했다. 우연히 살짝 열린 대문 너머로 집의 모습이 빼꼼히 내 비쳤는데, 그 외양이 정말이지 매우 특이했기 때문에 그저 골목 나들이의 수확으로 생각하고 사진 한 장 찍은 뒤 발길을 돌렸을 뿐이다. 사실 내가 그때 찾던 곳은 같은 동네에 있는 홍난파의 옛 집이었기 때문에,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뒤, 우연히 76년에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한국 백년"이라는 책에서 베델의 옛 집 사진을 보았는데, 퍼뜩, 이것이 내가 예전에 찍어두었던 사진 속의 집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역시 틀림없었다. 그 책에 실린 사진은 이렇다.

  
허둥지둥 그 집을 다시 찾아갔지만, 이미 집은 헐려버리고 그 터에는 굴삭기와 온갖 잡동사니들, 불그죽죽한 조끼와 노란 헬멧을 쓰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건설 관계자들 뿐이었다. 허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1908년 8월에 영국의 그 유명한 "Daily Mirror" 지에 캐나다 출신의 기자 F.A.Mackenzie가 찍은 베델의 집 사진이 나온 것을 보고, 이 집이 정말로 베델이 살던 집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08년 당시의 일간지 사진 인쇄라서 화질이 형편 없지만, 집의 모양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심지어, 국사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베델의 사진 속에도 이 집이 있었다. 베델의 왼쪽 어깨 너머로 이 집 본채의 튀어나온 부분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베델은 이 사진을 자기 집 마당에서 찍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존재를 사람들이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계속해서 자료를 찾다 보니, 1968년 7월 26일자 중앙일보와, 1971년 4월 6일자 동아일보, 신문평론 1975년 6월호에도 사진과 함께 이 집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고, 가깝게는 1998년에 나온 장규식의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 1권에도 이 집이 소개되어 있었다. 

문제는 단 하나. 말만 해두고 그걸로 끝내버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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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옛 집에 대해서 오인환 선생이 쓰신 논문에 정리가 되어 있지만, 정작 현재의 위치 판독 부분에서는 완전히 잘못된 결론을 내려놓으셨다. 중간중간에도 오류가 많고. 그래서 아래에, 내 나름대로 다시 정리한, 이 집의 내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집 자체가 한옥을 서양식으로 개조한게 아닌, 지붕과 목구조만 한옥이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 1904년에 베델이 이 나라에 들어와서 곧바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위에 소개한 매켄지의 기사를 비롯한 몇 가지 기록에는 이 집을 베델 본인이 직접 건축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평면구조 자체가 완전히 서양식으로 현관과 거실, 응접실, 실내 화장실 등을 갖췄던 걸 감안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당시 이 집은 건평 120평 가량에 대지면적은 약 900평 남짓이었으며,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왼쪽에 본채가, 오른쪽에 별채가 있었다. 베델은 본채의 앞쪽 튀어나온 부분을 서재로 삼고 그 곳에서 글을 집필했으며, 양기탁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전하는 향나무 한 그루를 마당 한 가운데에 심어놓았다. 

1909년에 베델이 심장병으로 사망한 뒤 이 집은 한동안 그의 미망인인 메리 모드 베델 (Mary Maud Bethell)의 소유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에 그녀의 이름이 보인다. 베델이 타계한 직후 그녀가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간 걸 감안할 때, 아마 미처 집의 소유권을 처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27년의 토지대장에서는 소유주가 "アリ-ス チャイルド ドカ-ムプ"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아마 당시 미국 선교사로 서울 새문안교회 등에 출석하기도 했던 앨런 포드 드캠프 (Allen Ford DeCamp)의 부인 앨리스 차일드 드캠프 (Alice Child DeCamp)를 가리키는게 아닌가 한다.

그러다가 1929년에 드 캠프 부부는 이 집의 지번 (당시 홍파동 2번지)을 분할해 왼쪽 본채를 2-1번지로 하고, 오른쪽 별채를 2-2번지로 나눈 뒤, 왼쪽의 본채가 있는 2-1번지 372평을 안동원이라는 사람에게, 오른쪽의 별채가 있는 2-2번지 502평을 구영숙이라는 사람에게 매각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1968년 7월 26일자 중앙일보에서 "배설 씨 옛 집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이 집에 대한 탐방 기사를 처음 낼 때까지, 이 두 사람 모두 이 집에서 기거했다.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안동원은 1948년 초대 제헌국회의원이었으며, 구영숙은 전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고 하니, 아마 두 집 모두 1920년대에나 1960년대에나 세력 있게 사는 집이었던 모양이다.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한가지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영숙이 살던 집, 즉 베델의 별채 건물은 이미 1968년 당시에 기둥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옥으로 개조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동원이 살던 본채는 위에 사진을 올려놓았듯, 2002년까지도 거의 변동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1년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집주인이었던 안동원 (당시 85세)이 이 집을 팔고 새로 이사를 가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너무 낡아서 이곳저곳 수리를 해도 도저히 지탱해 나갈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 당시의 원로 언론인이자, 초창기 여성 언론인이기도 한 최은희가 이 집을 매입해서 헐어내고 새로 근사한 기념관을 건축하자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고도 보도되었다

여기서 잠깐. 물론, 아무리 집이 낡았다고는 하지만, 멀쩡한 집을 헐고 기념관을 지어야한다는 발상은 조금 어이가 없게 느껴진다. 그것도 최은희 정도의 원로 언론인이라는 사람이 한 소리라니.

하지만 뭐, 알만한 사람들이야 다 알지만, 1970년대-80년대의 유적 보수-정화사업들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새로 건축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현충사, 오죽헌, 경주 불국사, 제승당, 강화 전적지 등등이 다 그랬다. 어쨌든 뭔가 깔끔하고 근사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는 이런 개념없는 소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는 터.

하지만, 이것조차 결국 말 뿐이었다. 아무도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낡아서 더 이상 유지가 안된다던 집도 그로부터 31년 뒤인 2002년까지도 잘 남아있었건만, 결국 100년 남짓한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놈의 뉴타운 드립 때문에.

아마, 아무도 뉴타운 아파트 100채를 주고서도 100년 동안의 시간은 사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으리라.

덧글

  • 시쉐도우 2010/01/28 22:48 #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사라져가는 것들과 잊혀져가는 모든 ..것들....
  • 消爪耗牙 2010/01/29 06:01 #

    ...lOTL
  • 들꽃향기 2010/01/29 06:04 #

    ..........ㅠㅠ
  • hyjoon 2010/01/29 09:59 #

    뉴타운 드립이 뭔지.......ㅠㅠ
  • 2010/02/04 12: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mtmr 2010/03/24 16:53 # 삭제

    거사님 글 잘 봤습니다. 그런데 오류가 있는 듯합니다
    저는 2000년 5월에 부귀빌딩 건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귀빌딩이 이미 2000년 5월 이전에
    건축돼 있었다는 얘기고
    님이 제시한 2002년 5월 베델 집이라는 사진은
    부귀빌딩 터에 있던 건물의 사진일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베델 집은 홍파동 2-4 번지로
    아직 지번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부귀빌딩 자리인 교북동 11-1 번지일 수 없는 거죠

  • 진성당거사 2010/03/24 18:00 #

    동아일보의 내용은 다소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홍파동 2-4번지라는 건물은 아마 딜쿠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는지요? 지금 현재 홍파동이 법정동명이 아닌 것도 조금 문제가 있구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제가 좀 더 확인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 mmtmr 2010/03/24 18:53 # 삭제

    딜쿠샤는 행촌동 1-88번지로 아직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만...
  • 진성당거사 2010/03/24 21:05 #

    아까 지적하신 내용 때문에 지적도 등등을 찾아서 다시 확인해보니 제가 오류를 범한 것 같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2010/03/25 13:30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암호 2010/08/25 23:12 #

    구영숙이라는 이름이 설마하다가 장관직까지 쓰여진 것을 보고, 늦었지만 짧은 댓글을 올립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과 헤이 스팅스 소년병 학교 동기이지요. 위의 내용을 보니,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할 때에 그 저택을 구입하고, 살기 시작했겠군요.
  • 진성당거사 2010/08/26 15:13 #

    아,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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