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발굴과 금관의 수난, 쇄말적 (瑣末的) 흥밋거리.........(1) by 진성당거사

*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 첫번째 연재 글이 되겠네요. 주기적으로 글을 올릴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만, 올라올 때마다 자주자주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래의 흐릿한 신문기사 보도 사진 한 장을 잘 보시라. 한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신라 금관을 쓰고 다소곳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소 갸웃한 얼굴 표정을 하고 서 있다.

이 여자의 이름은 차릉파 (車綾波). 1936년 당시 나이 22세. 평양 기성권번 (箕城券番) 출신의 기생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서도소리 실력으로 나름 '명기'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째서 평양 여자가 신라 금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진짜 큰 문제는 이 사진 속의 금관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 신라 금관(!)이라는 것이다.


평양 기성권번 기생 차릉파. 일명 "신라 제 57대 여왕"


이런 일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된 것인지, 이제 모든 일의 시작을 찾아, 타임머신을 타고 1926년, 식민지 조선의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노서리로 돌아가보자.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타임머신의 시동이 걸립니다.)

 




1926년 8월 17일, 노서리 마을 한복판에서는 흰 옷을 입은 일꾼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흙을 지게에 지고 바쁘게 나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몇년 전부터 마을에 자리잡고 서서히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던 시천교(侍天敎) 교당 측이 새로 건물을 확장하고, 주변 경역을 넓히기 위해 교당 한쪽 담장 너머에 우뚝 솟아 전부터 거슬리던 커다란 흙무지를 없애버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마을에서는 이것이 고려 태조 왕건이 배 모양의 경주 땅을 풍수지리적으로 '가라앉히기 위해' 만든 인공 흙무더기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고, 그래서 마을 유지들은 이 흙무지를 없애버리면 마을이 다시금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형세를 띄게 될 거라는 생각에 시천교 교당 측의 요청을 별 무리 없이 허락했다. 파낸 흙들은 마침 경주 읍내 서쪽에 새로 짓는 경부선 기관차고 (증기기관차들을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한 시설)을 짓는 곳에다 지반 매립용으로 보내기로 했다.

찜복 더위 속에서도 마을 장정들은 벌써 몇달 째 계속해서 이 흙무지를 파내고 있었다. 갑자기, 일꾼 박씨의 삽날에 "쨍그랑!"하고 이상한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생긴 인부들이 주변을 삽자루로 찍자,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나뭇조각과 이상한 철조각들, 그리고 작은 금 구슬 두어개가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봉총'으로 알려진 노서동 129호분이 1500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세상에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현재 경주시 노서동 고분공원에 있는 서봉총의 정비된 상태.
2009년 3월 26일 진성당거사 본인 촬영.


이미 5년 전 (1921년)에 같은 동네의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박문국이라는 동네 주막집 주인이 방 한칸을 늘릴 생각으로 땅을 파다가 엄청난 양의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발견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여러 날에 걸친 긴급 조사 끝에 1500년 동안 묻혀있던 신라의 금관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그 자리의 옛 무덤은 '금관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서리 마을에서 흙무더기를 파내다가 이상한 물건들이 나왔다는 소식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발굴부 촉탁이었던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897 ~ 1993)의 귀에 들어갔다. 2년 전인 1924년에 이곳 근처에서 '기마인물형 토기' (국보 제 91호) 로 유명한 금령총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둔 그에게 이 소식은 또 다른 발굴 대박을 터뜨릴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그는 당장 현장으로 달려갔고, 순사들을 불러 주변에 웅성거리며 모여있던 사람들을 쫒아내고 주변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고이즈미와 그의 두 조수들은 이틀간에 걸친 측량조사 끝에, 이 흙무지가 한때는 엄청나게 커다랗던 전형적인 신라 적석목곽분이며, 쌍분 (무덤 언덕이 두 개 이어져 있는 구조)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들은 8월 20일, 개관한지 4개월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던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1차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초대 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해 온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는 이 무명총(無名塚)을 발굴키로 결정했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보고를 올린 뒤, 발굴을 위한 특별 예산 3000원을 지급받았다.

고이즈미는 다시 현장에 찾아가 마을 장정들을 불러, 시천교 교당의 부속 건물 대부분을 비롯한 일대의 모든 집들을 모조리 헐어내라는 총독부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혹 떼려다 되려 혹을 붙인 격이 된 시천교 교당이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아무 기록이 없다.

8월 27일, 마침내 주변의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제 남아있던 봉토들을 고르게 깎아내고 그라인드 선을 잡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경주 기관차고 공사 현장에서 노서동 마을까지 임시 철길이 놓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흙이 사람이 끄는 화차에 실려 기관차고 공사 매립현장에 부어졌다. 주변의 흙 한줌까지 체로 걸러내는 오늘날의 고고학 발굴작업의 눈으로는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작업 수준이 그닥 높은 편도 아니었고, 게다가 현장에 고고학자라고는 고이즈미 한 사람 밖에 없었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9월 3일, 고이즈미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전날 경주에 도착한 총독부박물관에서 보낸 사진기사들 두 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이 촬영한 첫 사진은 84년 전에 서봉총 주변의 모습이 어땠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1926년 9월 3일 촬영된 서봉총 발굴 현장.  서봉총 서쪽 윗편에 홀로 서 있는 2층짜리 기와집이 시천교 교당이다.
흙을 운반하기 위한 레일과 화차들의 모습도 보인다. 주변에 온통 초가집들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고이즈미는 먼저 남쪽 봉분과 북쪽 봉분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봉분 가운데 남쪽을 먼저 발굴했다. 그러나 그는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발굴조사 전 이 곳에는 이미 초가집 한 채가 들어서 있어 지형도 무척이나 평탄하게 되어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매장 시설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던 것이다. 그가 수습한 것은 한두 조각의 토기 파편과 자잘한 곡옥 몇 개가 전부였다. 대신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북쪽 봉분에서는 보다 완전한 유구들이 발견될 것으로 보고 며칠 뒤인 9월 10일, 북쪽 봉분의 발굴 조사에 착수했다.

적석 유구들을 본격적으로 헤쳐 나가면서 고이즈미는 다량의 신라 토기들과 각종 유물들을 수습했다. 9월 21일에는 적석 유구 내에서 "연수원년 신묘(延壽元年 辛卯)" 라는 연호가 새겨진 은제 함이 출토되었다. 고이즈미는 나중에 발표한 간략한 발굴 보고서에서 이 은제 함을 신라에서 제작되어 사용된 유물로 "매우 귀중하고 특필할 만한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연수'라는 연호가 어디서 비롯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이 은제 함이, 1946년에 발굴된 호우총의 고구려 호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 유입된 유물로 보고, 이 '연수 원년 신묘'를 고구려 장수왕 39년인 451년으로 보는 학설이 나와 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노서리에는 이윽고 수많은 구경꾼들과 함께 일본인 유력인사들이 자주 나타났다.

먼저 9월 25일에는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부부가 방문해 하루 종일 발굴 현장을 참관했고, 9월 27일에는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츠노미야 (高松宮)도 다녀갔다. 9월 28일에는 마침 수학여행을 왔던 경성제국대학교 예과생들이, [조선사 강좌]로 유명한 동양사학자 오다 쇼고 (小田省吾) 교수의 인솔로 현장 견학을 왔는데 당시 이들 예과생들 가운데에는 해방 이후 국사학계의 제 1세대로 활동한 신석호(申奭鎬)도 끼어있었다.



  
 서봉총 발굴 현장을 참관 중인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부부. 1926년 9월 25일. 


그러나 조만간,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국제적 인사 한 사람이 이곳 발굴 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이곳 발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을 발굴해내게 된다.

(다음편에 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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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hyjoon 2010/02/18 22:43 #

    이거 언젠가 HD역사스페셜에서 살짝 언급했던 것 같군요.........
  • 2010/02/18 23:06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준님 2010/03/01 23:11 #

    서봉총의 "서봉"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바로 그 국제적 인사때문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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