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발굴과 금관의 수난, 쇄말적 (瑣末的) 흥밋거리.........(2) by 진성당거사

난편 보기 : 서봉총 발굴과 금관의 수난, 쇄말적 (瑣末的) 흥밋거리.........(1)

1926년 10월 9일 저녁, 부산 항구.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그의 부인은 곧 배에서 내릴 국제적 저명인사 한 사람을 마중하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몇 사람의 일행과 함께, 성큼성큼 갑판을 내려오는 안경 쓴 키 큰 유럽인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오스카 프레드릭 빌헬름 올라프 구스타프 아돌프 폰 베르나도트 (Oskar Fredrik Vilhelm Olaf Gustaf Adolf von Bernadotte, 1882 ~ 1973), 바로 스웨덴의 황태자1)였다. 그는 부인과 그의 동생인 빌렘 왕자 내외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는 길에, 일본과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이 여행은 영국인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 (Louise Mountbatten)2) 이 심한 우울증으로 몸 상태가 악화된 것 때문에 이를 요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곳저곳에 들려 약간의 정치적인 논의에도 참가하고, 문화 사절로서 박물관이나 오페라 하우스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구스타프 아돌프 스웨덴 황태자 부부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내외. 1926년 10월 9일 밤. 


다음날 아침,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 내외는 사이토 총독의 안내로 고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는 도시, 경주를 방문한다. 사실 그는 10월 8일에 시모노세키에서 있었던 송별연회에서, 이곳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다. 대학에서 동양미술사와 고고학을 전공했으며, 자국 내에서도 여러 차례 발굴 조사에 참가했던3)  그였기에,  이 고분 발굴은 그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0월 10일 새벽에 석굴암에 올라 일출을 감상하고 석굴을 관람한뒤, 불국사에 들려 불국사를 관람하였고, 그날 오전 8시 무렵에는 읍내로 나와 경주박물관에서 에밀레 종 소리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전 10시 쯤에 노서동의 고분발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10월 9일에 이르러서는 고이즈미의 작업을 통해 무덤 목관의 바닥 면이 완전히 발굴되어, 이제 약간의 흙만 걷어내면 관 내 부장품들이 모두 확인될 터였다. 고급 양복을 그대로 입은 채, 그는 발굴 현장에 곧장 뛰어들었다. 그가 몇 시간에 걸쳐 고이즈미와 함께 발굴 작업을 주도해 나가는 동안,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내빈들은 그 옆에서 이 광경을 호기심에 가득 차서 지켜보고 있었다.

발굴에 몰두하고 있는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 사진 오른쪽에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고이즈미이고,
사진의 가운데 위편, 모자를 쓰고 돌 위에 걸터 앉아있는 사람이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이다. 


마침내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고이즈미와 구스타프 황태자의 입에서 "아!"하는 작은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것은 2년 전에 고이즈미가 금령총에서 찾아낸 것과 똑같이 생긴 금관이었다. 금령총의 금관보다는 훨씬 크기가 컸다. 1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찬란하고 투명한 노란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서봉총 금관 발굴 당시 노출 상태. 곡옥과 금팔찌 등의 다른 장신구들이 아랫쪽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것이 보인다. 


이윽고,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는 직접 금관을 들어내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에 넣었다. 경주 박물관으로 가지고 가서 세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옆의 곡옥들과 다른 유물들도 모두 세척해서 놓았다.

본래 구스타프 황태자는 그날 오후 열차를 타고 경성에 들러 만찬회를 가진 뒤, 11일 오전에 중국 땅을 밟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황태자는 점심을 먹은 뒤 일정을 변경해서 다시 고분 발굴현장으로 돌아왔다. 아마 금관이라는 엄청나고 특이한 유물을 직접 발굴해 낸 것이 내심 기뻤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또 하룻밤을 경주에서 머물게 된다.

이 때의 광경이 당시 매일신보 (1926년 10월 12일자)에는 제법 긴 기사로 소개되어있다.4) 
(다만 당시를 기록한 다른 증언들이나 기록들과 검토해 보면, 다소 사실관계 오류가 눈에 뜨인다.)



"발굴하신 無名塚에 '瑞鳳塚'이라 御命名"
경주의 남기신 전하의 발자취, 광영은 무명총에까지 미치다. 경탄할 古物鑑賞眼
 
瑞典 황태자전하게옵서는 십일 오후 여섯시 신라천년의 유적을 마음껏 찾으신 후 석양 귀로에는 고분의 발굴이 점점 가경에 들어가 열심으로 발굴하신 결과 마침내 흙속에서 여러 가지 고기를 파내시와 그 기술의 탁월하심에는 전문가들도 경탄하게 하옵시었다. 발굴이 끝나시자 전하께서는 이 고총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시자 즉시 한문글자로써 瑞典이라는 瑞자를 따시고 새 봉鳳자를 잡으시사 친히 瑞鳳塚이라 어명명을 하옵시었다. 이로써 서봉총의 광영은 영원히 남아 전하의 발자취를 머물러 드리게 되었으며 돌아오시는 길에는 골동품판매점에 이르시사 여러 가지 고물을 친히 손에 들어보시며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이시었다. 전하가 사시는 물건은 전부 전하 자신이 감정을 하시었으며 그 물건이 전부 상당히 유래 있는 것들 뿐이었으며 고총발굴로 일정이 연기되시어 경주의 제2일을 다시 불국사 호텔에서 지내시었다.
 
산적한 헌상품
서전황태자전하 일행은 11일 오전 여덟시에 경주 불국사 호텔을 출발하사 대구를 지나 경성으로 향하셨으며 경주에서 전하께 獻上한 물품은 역사에 관계 있는 것으로 수량도 많다더라.
 
고분발굴에 滋味 붙히시사 경주 일정 변경
경주 路西里 고분발굴장에 행차하신 서전황태자전하께서는 현장에 그대로 둔 최근 발굴한 金冠 腕環 등 고대 미술품에 비상한 취미를 가지시고 친히 그곳을 발굴하시고 오후에는 그곳을 발굴하시기 위하여 일정을 변경하셨더라.
 
他鄕에 逢同胞, 대단 반기시다
서전황태자 전하께서 십일에 경주 路西里에서 고분을 발굴하시는데 두 명의 서전 부인이 배알하기를 청함으로 加藤이 이 뜻을 아뢰인즉 곧 두 부인을 인견하셨다. 이 두 부인은 大邱 있는 선교사인데 전하께서는 이러한 異域僻地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보심은 의외로서 진정 반갑다는 말씀을 하셨더라.



11일 오후에 경성 총독부에서 가진 만찬회에서, 구스타프 황태자는 사이토 총독 부부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위의 신문 기사에서 '헌상품'이라고 쓴 그것이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이토 총독은 고려 청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고, 총독의 부인 하루코 여사는 신라시대의 금귀걸이 한 쌍을 선물했다는 증언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이토 총독이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나, 이들 유물의 적법한 소유자가 조선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러나 서울에서 경복궁과 탑골공원 등등을 구경하느라 또 이틀을 지체하고서 14일에야 평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마침내 15일에야 만주 봉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의 일정보다 자그마치 4일이나 늦어진 셈이었다. 하여튼, 구스타프 황태자는 분명 식민지 조선의 문화에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현재 서봉총 옛 터에 세워져있는 '서전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폐하' 서봉총 발굴기념비.


이렇게 해서 노서리 129호분은 '서봉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꽤 긴 기간의 작업 끝에 1927년 1월부터 서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탁보관되어 전시되게 되었다. 금관의 소유자는 조선총독부 경주박물관이었지만, 경주박물관의 금관고에 이미 금관총에서 발굴한 금관이 전시되어 있었고, 또 금관이 한 곳에 두 개나 있으면 보안상의 문제가 있을거라는 우려가 높았던 탓에 총독부 박물관이 소장하기로 한 것이었다.

발굴 조사는 1926년 10월 19일에 종료되었고, 그날 오후 일본 교토에서 온 어느 일본인 고승이 발굴이 끝난 것을 기념하고 무덤의 주인공을 위한 위령 법회를 지냈다5) . 그 다음날로 남아있던 봉토와 자갈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이것들은 앞서 말한대로 경주 기관차고 공사 현장에 부어졌다.

몇 달 뒤, 일본 교토대 소속의 동양사학자로, 서봉총 발굴 당시 이곳 발굴을 참관했던 하마다 게이사쿠 (濱田耕作) 박사가 직접 휘호를 써서 새긴 '서봉총'이라는 비석이 무덤 옛 터에 세워졌다6) 이로서 서봉총의 이야기는 끝났나 싶었다.

하지만 서봉총의 수난은 지금부터였다.


(다음편에 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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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1950년에 부왕 구스타프 5세의 뒤를 이어 67세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에 등극하였다. 

2) 그녀는 현재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의 고모였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나는 홀아비나 왕족이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거야"라고 맹세했다고 하는데, 정작 그녀의 남편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는 왕족인데다가 첫 아내를 병으로 잃은 홀아비였다.

3) 그가 고고학자로 참가했던 가장 유명한 발굴 작업 가운데에는 1958년에 스톡홀름 항에서 발견된 17세기 난파선 '바사 (Vasa)' 호의 발굴 인양작업이 있다.

4) 1편 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은 고이즈미의 회고담과, 고이즈미가 작성해 청구학회에 보고한 발굴보고서 초록, 그리고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근거로 재구성했다. 서봉총 발굴작업에 대해 흔히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기록은 경주의 향토사학자인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 ~ 1980)가 남긴 회고록인데,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1925년부터 경주박물관의 발굴반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서봉총 발굴 당시 구스타프 황태자와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최남주의 기록이 대단히 신빙성이 떨어지며 많은 부분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이 글에서는 최남주의 증언을 거의 참조하지 않았다. 최남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후에 별도의 포스팅으로 할 생각이다.
    
5)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고이즈미가 주최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4년의 금령총 발굴 때에도 고이즈미는 일본에서 승려를 모셔와서 개토제와 위령제를 지낸 바 있었다.

6) 현재의 서봉총에는 이 비석이 남아있지 않은데, 아마도 1970년대의 대릉원 및 노동동-노서동 고분공원 '정화사업' 때에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재 서봉총에는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구스타프 아돌프 스웨덴 국왕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덧글

  • 들꽃향기 2010/03/05 23:35 #

    잘 읽고 갑니다. ^^ 그나저나 루이즈 마운트베튼의 얼굴이 사진에서도 우울하게 보이는군요 ㄷㄷ
  • 초록불 2010/03/06 00:07 #

    여기서부터 스웨덴 고고학자 운운의 유사역사학 전설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2010/03/06 11:23 #

    아직까진 희망에 넘치는데 수난의 시작이라니 OTL
  • ivk 2010/05/20 22:37 # 삭제

    서봉총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여관에서 글을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0/08/14 09:12 # 삭제

    우와 저 부산에 도착한 사진은 첨봤어요.@@
    그런데 첫번째 사진이 잘못되었답니다. 첫번째 사진은 구스타프6세 아돌프가 아니라 아들이자 현 스웨덴 국왕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사진에서 돌위에 앉은 여성이 루이즈라고 하셨는데, 고이즈미 옆의 여성이 루이즈 같거든요.(옆모습이 똑같긴한데 제가 사진설명이 나온 것을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0/09/03 12:05 #

    첫번째 사진 지적 감사합니다. 현장 사진의 경우는 사진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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