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크리트 광화문이여, 굳빠이.
(1968. 12. 12. ~ 2006. 12. 4)
(* 원래 15일에 올릴 예정으로 그날 저녁부터 작성하던 글이었지만,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퍽 늦은 지금에야 올리게 된다. 중간에 구글 크롬의 오류로 몇번 썼던 내용을 날려먹기도 했고.)
(** 여기 소개한 사진과 신문기사 자료들 다수는 문화재연구가 이순우 선생님의 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http://cafe.daum.net/distorted)에서 인용했습니다. 근대 이후의 역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많은 정보가 담긴 카페이니, 본 카페의 게시물을 일독하시길 권합니다.)
1966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에서는 6.25 전쟁 중에 불타버린 광화문 (당시 사적 117호)과, 1914년에 철거된 서대문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당시 처음 제정된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서울 시내에 관광객을 위한 새로운 랜드마크를 조성하려는 계획이 더 앞섰던게 아닌가 싶다. 한편, 다른 기록에서는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가 "광화문과 서대문 등을 복원하여 민족정기의 상징으로 삼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광화문 복원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기사는 위에 보이는, 1966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기사의 제일 끝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과 관광객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으로 (광화문)을 옮길 계획"이었다고 한다. 확실히 1960년대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 자체가 전혀 정립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광화문과는 직접 상관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증거하는 짧은 동영상을 아래 올려놓는다.

1962년 1월 6일자 '대한뉴스' 보도 中 "건설의 새소식" 코너.
덕수궁의 돌담을 허물고 새로 철책을 설치한 것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현재의 시청 방향 덕수궁 돌담은 1980년대에 가서야 재건축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약 1년여간의 심의와 논의 끝에, 1967년 11월에 마침내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공사는 곧바로 난항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문화공보부 소속이었던 문화재관리국의 복원 계획안과 서울시 도시계획국이 내놓은 계획안이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67년 11월 9일자 기사에서 당시의 이 엇갈린 두 가지 계획에 대해 알 수 있다.
(전략) 지난 6일 서울시 건설당국자는 68년도 예산으로 1억 2천만원을 들여 광화문을 현 중앙청 정문으로 복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설계와 계획이 이미 끝났으며 건물은 콘크리트로 복원될 것이라고 했었다. 한편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7천만원 예산으로 3개년에 걸쳐 목조 조영을 하여,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복원해 종합박물관 정문으로 사용할 계획이라 한다. (후략)
당시 문화계 인사들의 상당수는 "서울시의 콘크리트 계획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라며 반발했지만, 또 일각에서는 광화문의 완벽한 재현보다는 '실제 활용'에 비중을 두기도 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무려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의 학과장으로, 한국 고고학 1세대로 널리 알려진 삼불 김원룡 교수도 있었다. 김원룡 교수는 67년 5월 15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썼다. 좀 길지만 핵심 부분을 인용해본다.

(전략) 이왕 광화문을 살아나게 한다면 그것을 서울의 상징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나 가치도 되살려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외국인만을 상대로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제 2한강교가 생기고 나서는 공항에서 시청 앞 중앙청까지 오는 사이에 아무 고유의 전통적 유적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종래의 남대문 대신에 새로운 코스에 이 광화문을 배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도시미를 위해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유미를 위해서, 그리고 서울의 상징같은 사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광화문을 서울 중심부와 외면한 현 위치에 두지 말고 중앙청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의 어느 위치에 남면하도록 복원 재건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다. (후략)
삼불 김원룡 선생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글을 보면, 무려 "고고학자"가 이런 "反고고학적"인 발언을 해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시절이 1960년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사업을 먼저 추진한 서울시 도시계획국의 계획대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조로 '복원'되게 되었다. 이 계획이 최종 확정된 것이 언제인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대략 1967년 10월 경에는 서울시 측의 모든 사업계획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8년 3월 15일, 정일권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의 복원 기공식이 열렸다. 1968년 3월 19일자 한국일보에는 당시 광화문의 철근 콘크리트 복원공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자세히 쓰여 있다.

(전략) 제 모습은 밝혀졌지만 이번 공사는 완전한 제 모습은 재현할 수가 없다. 첫째, 그 자리는 원래 위치보다 뒤로 14.5미터 후퇴한다. 중앙청 앞 큰길에 그 자리를 뺏겼기 때문이다. 공사의 핵심인 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다. 밖에서 안 보이는 부분까지도 목재를 썼을 때와 같이 콘크리트 대들보를 놓고, 콘크리트 처마를 얹고, 다시 단청해서 모양은 같아지지만 콘크리트 문화재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얘기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막대한 자동차 교통량의 진동을 목조가 견딜 수 없고 또 원래의 아름드리 회목이나 규목 (오대산 産)을 지금은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콘크리트 광화문은 그 수명이 1천년은 간단다. 아치형 문이 셋 있는 삼예문도 지금 남아있는 화강암으론 쌓지 못한다. 불탄 그을음이 많아 석축의 돌 약 80퍼센트는 쓸 수가 없다는 것. 또 르네상스 스타일인 중앙청과 이조 때 건물인 광화문과의 조화도 하나의 문제다...(중략)....중앙청 정문으로 복원될 광화문의 홍예문은 자동차 전용이 되고 인도는 그 밑에 지하도로 마련된다.

1968년 9월호 '사상계'에 실린 광화문 복원공사 광경.
자세히 보면 공사의 시공자가 다름아닌 공영토건(土建)임을 알 수 있다.
공사는 9개월 동안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마침내 1968년 12월 12일, 마침내 콘크리트조 광화문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68년 12월 10일자 경향신문에 그 모습이 처음으로 실렸다.

"광화문의 이름은 '덕이 온누리에 비친다'는 뜻에서 나온 것.
이 문의 준공과 더불어 선정의 기틀이 더욱 공고히 되어지기를."
12월 12일, 대망의 준공식이 있었다.
아래는 당시 대한뉴스에 보도된 자료화면 모습이다. 박정희-육영수 내외가 자필 현판을 제막하는 순간도 담겨있다.
내래이션에서 오만가지 늘어놓는 수식어구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사흘 전의 뉴스 보도에서도 나왔다는 건 뭔가 묘한 일이다.

당시 주요일간지 대부분이 광화문 복원에 대해 크고작은 기사와 사설을 냈지만, 그 가운데 하나인, 매일경제신문 기사를 아래 소개해본다. 다른 신문에는 실리지 않은 희귀한 사진도 하나 들어있다.

앞의 한국일보 기사에서 소개된 대로, 광화문은 처음부터 중앙청의 자동차 전용 출입구 노릇을 톡톡히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철근 콘크리트 조' 광화문은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끝으로, 1968년 12월 8일자 "썬데이서울"에 실린 '콘크리트를 찰떡처럼 주무른 사나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소개한다. 이 기사는 당시 광화문 복원공사 현장책임자였던 구일옥 씨 (*훗날 L건설의 사장이 된)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기사의 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전략) 그의 말로는 콘크리트에 의한 광화문 복원공사의 성공으로 우리나라 건축업계는 더 정묘한 콘크리트 건축물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광화문은 아마 1천년은 까딱없을 겁니다. 선조의 유물을 복원하는 보람있는 일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더 연구를 해서 새 공법의 연구개발도 하고 싶다고 의욕적이다. "고려자기의 곡선을 콘크리트로 나타낼 수는 없을까?" 요즘은 이런 엉뚱한 꿈에도 잠겨본다고 했다. (후략)
하지만, 천 년은 간다던 콘크리트 광화문은 겨우 38년만에 딱하게도 이 세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말많고 탈많던, 온갖 미사여구와 덧붙여진 의의로 가득찼던, 1968년의 공사도 결국은 군사정권시대의 부질없고 무개념한 작태로 기억되고 말았다.
며칠 전, 이제 새로 목조로 다시 조영한 광화문이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났다. 이전에도 다른 포스팅에서 짧막하게 지적했던 바이지만, 부디 '공기단축 타령'에 허겁지겁한 나머지, 저 1968년의 결과물보다 더 형편없는 결과물이 역사 속에 남도록 하지는 말길 바랄 뿐이다.

새로 복원된 광화문이여,
부디 역사 속에서 오래 기억되는 우리의 진짜 유산으로 남아주길.
추가 (10/08/19, 오전 6시 2분) -
이 밑에 엉망진창으로 비로그인하고 글 쓴 작자들에게 한 소리 하겠습니다.
우선 난 좌빨이 아닙니다. 나같은 호고주의자에게 좌빨이라는 말, 큰 모욕입니다. 수꼴이라는 말 만큼이나 기분 나쁜 말이지요. 좌빨의 개념도 잘 모르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 사상적 스펙트럼이 완벽한 왼쪽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는지.
이전에 쓴 글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콘크리트로 공사한 걸 갖고 완전히 무식한 짓이라고 매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콘크리트 가지고 공사 했던 건 1940년대 이전의 이야기고. 이 공사는 1968년의 것이라는 걸 기억해주시길.
군사정권 시대의 부질없고 무개념한 작태라는 말이 뭐 어때서요? 위에 인용한 신문기사를 비롯해 여러가지 자료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겠지만, 목조 조영을 전혀 못 했던 것도 아니고, 목조 건물로 복원하는 예산이 훨씬 저렴했는데도 콘크리트 건물을 지은 건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광화문 하나만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으면 말을 안하겠지만, 그 후 박정희 시대에 저런 식으로 철근콘크리트 조로 '복원'한 건물이 전국에 셀 수 없이 많아졌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 공사가 그나마 쇠퇴해가던 전통 목조건물 조영의 기회를 이후 70년대 말 까지 사실상 차단해버린 계기가 된 거 아시기나 합니까?
그리고 박정희 타령 좀 그만 하시지요. 난 박정희 대통령이 광화문 복원을 공구리로 하라고 했다는 말 여기다 한줄도 쓰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당시의 유력자 이름이라고는 정일권 국무총리 한 사람 들먹였습니다. 그 사람도 공구리로 복원하라는 말 안했고요. 이거야 말로 난독의 극치이군요.
덧글
김원룡 선생은 아마도 콘크리트로 복원되는 광화문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에 불과하니 어디에 세운들 어떠랴...하는 속뜻으로 저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분이 광화문 따위 어찌되든....이럴 분은 아니니까요.
예전에 광화문 복원시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어요^^ 잘 읽었습니다~
마치 그 당시엔 콘크리트로 하는게 상식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덧글들의 주장은 당장 틀린 거 같은데요.
"부질없고 무개념한 군사정권시대의 작태(였다)"
라는 사실은 공구리를 쳐놓은듯 1천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 것 이라는 점이 안타깝군요..
군사정권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복원할 능력도 없었고 또 당시만 해도 제대로 복원한다는 것의 의미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겁니다. 괜히 서로 흥분해가며 비난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후손들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을텐데 이게 우리가 무식한 탓이겠습니까?
당시 우리 아버님 세대의 한계와 도전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