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쓰는,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에 대한 몇가지 Critical Points by 진성당거사

아내가 책을 냈습니다

초록불 님이 저 소식을 전해 주신것이 거의 2개월 가까이 경과했고, 책도 퍽 빨리 입수했는데, 한동안 여러가지 일로 정신이 없어 이제서야 이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때 막 출판된 장태동 씨의 '서울문학기행'을 처음 읽었던 이후로 서울 시내의 문학 관련 유적지나 명소에 대한 책들을 늘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상 아쉬웠던 것은, 이 카테고리 안에 들어간 책들에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는 점이었지요. 얼마 되지 않는 증언이나 단편적인 글들을 토대로 잘못된 정보를 기재한 것이 상당히 많았고, 그 장소에 대한 연혁이나 사실관계도 매우 틀린 곳이 곳곳에 보이더군요. 더구나, 한번 기록된 정보를 끊임없이 되풀이 했던 것도 문제구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상당히 기대가 컸습니다. 무엇보다도 꽤나 오랫만에 나온 문학기행 책이기도 했고, 이번에는 뭔가 다르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전반적으로, 책의 내용은 퍽 만족스러웠습니다. 인용문을 군데군데 적절하게 배치했던 점도 마음에 들었고, 서울을 한바퀴 직접 도는 듯한 생생함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문체도 딱딱하지 않고 마치 실제로 문학기행을 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확실히 지금까지 나온 관련 책 가운데는 가장 독보적이고,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몇 군데 좀 고치고 보완하면 더 좋았을 부분이 눈에 보이더군요.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200여번을 통독하면서, 발견할 때마다 찾아놓고 메모해 둔 몇가지 부분에 대해 아래 적어보겠습니다. 저 역시 글을 잘 쓰지 못하고, 배움도 짧은 편이지만, 이렇게라도 조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몇 자 적습니다.

(P.23.)
"그러나 1962년 이후 부르주아적 사고 방식이라고 비판받고 집필금지를 당한 채 압록강 인근 양강도 삼수군에서 노동자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 문장이 조금 매끄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에 "백석은"을 집어넣고, "부르주아적 사고 방식의 소유자라고 비판받은 뒤"로 바꾸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P.59)
"그에게 고종은 1916년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리고"
-> 1916년이 아니라 1885년입니다. 1916년은 배재학당 동관이 건립된 연대입니다.

(P.61)
"배재학당 터를 독립신문사 터로도 말합니다. 학당 지하에 있는 인쇄부에서 우리나라 최초 한글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을 인쇄했기 때문입니다."
-> 독립신문사 터는 대략 현재의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38번지/39번지, 즉 당시 독일영사관이 있던 터 언저리로 추정됩니다. 보다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시사저널 1075호 (2010, 6. 1)에 연재된 이순우 선생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배재학당 인쇄부 얘기는 배재대학교 측이 별 근거 없이 주장하는 낭설에 가깝습니다.

(P.62)
"이 교회에서 찬송가를 듣고 배우고 부르다가 음악적 재질을 찾고 서양음악가로 이름을 남긴 이가 있습니다."
-> 홍난파가 어린 시절 잠시 정동교회를 나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낸 것은 새문안교회를 다니며 그곳의 집사 김인식에게서 서양음악에 대한 지식을 받은 뒤부터이기 때문에 이 표현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동교회는 옛 모양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현재의 정동교회는 1925년에 대대적으로 증개축을 한 형태입니다. 이 때 교단 양쪽의 돌출부와 종탑이 새로 지어지고, 지붕도 교체되었으며, 내부의 남녀 구분용 벽체도 철거되었습니다. 

(P.67)
"그 옆으로 신아일보사 별관. 자주색 벽돌의 고풍스런 건물은 방치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 신아일보사 별관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 40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지정문화재 보호제도가 형편없는 건 사실입니다만, 완전한 방치 상태는 아닙니다.

(P. 68)
"손탁 여사는 고종에게 가배 (커피의 음역어)를 소개한 장본인이죠." 
-> 이미 목인덕, 즉 뮐렌도르프가 1883년 11월에 서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음을, 주중 영국공사관 직원이었던 윌리엄 칼스 (William Carles)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5년 연초에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알현했을 때도 명성황후에게 커피를 대접받았음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P.72)
"총탄에 쓰러진 집주인의 운명처름 이 집도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냅니다. 한때 타이완 대사관저였다가 6.25  때는 미국 특수부대 주둔지가 되었고, 지금은 병원의 본관 역할을 하고 있죠."

-> 우선 경교장이 미군 특수부대의 주둔지였다는 건 여러 글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6.25 중에 일부 미군들이 이 건물을 자신들 편의를 위해 사용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6.25 휴전 이후에는 원 소유주 최창학에게 다시 넘어갔었고, 1964년까지 남베트남 공사관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P.74)
"여러 전각들은 각각 중구 필동의 동국대학교 구내로, 광운사, 중구 남산의 박문사의.......사직단 뒤로 이건됩니다."
-> 내용상에 문제는 없습니다만 다소 두서없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각각의 장소 뒤에 괄호를 넣어 어떤 건물이 그리로 옮겨졌는지를 설명하시거나 - 가령 "동국대학교 구내 (숭정전)" 식으로 말입니다 - , 아니면 간략히 "이곳저곳으로 옮겨졌다"라고 쓰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P.82)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이 광화문 사거리에 신문사를 세우겠습니다." 인촌 김성수의 주장대로...."
-> 이 부분은 현재 문화재 안내판에도 쓰여 있는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사료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처음 나타난 책은 재단법인 인촌기념회가 쓴 1976년의 "인촌 김성수전"인데,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인촌 김성수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과 칭찬만으로 가득차 있어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P.88)
"총독부에 의해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뀐 거죠".
-> 세검정 앞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을 이른바 "청풍계"라고 불렀는데, 그것에서부터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개천'이라는 원래의 지명이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서서히 '청계천'으로 일반화되었던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현존하는 '청계천'의 최초 유래는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 기사, "청계천변 시찰"인데, 여기서는 "개천, 일명 청계천"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P.97)
"임화가 '보신각을 굽어보는 낯선 건물'이라 말한 것은 6층짜리 화신백화점이었습니다."
-> 이 부분의 설명은 조금 부적절합니다. 임화가 <다시 네거리에서>를 발표한 1935년에는 화신백화점이 아직 준공 단계로 건물의 외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보신각 바로 뒷편과 옆에 있었던 한일은행 본점과 종로서관 건물이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합니다. 

(P.98)
"일본인 거주지역인...미나카이 백화점 (명동 밀리오레), 히라다 백화점 (대연각센터)에 대항했던 민족자본가의 백화점을 본 시골소년 창수가 놀라는 게 눈에 선합니다." 
-> 화신백화점의 경영자 박흥식은 대표적인 친일 자본가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이니 민족자본가라는 호칭은 조금 힘들듯 합니다. 

(P.99)
"이곳엔 혼인 전에 죽은 왕손들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어요, 그 사당 이름이 수진궁이었습니다."
-> 완전히 틀린것도, 맞은 것도 아닌 애매한 설명입니다. 본래 수진궁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집이었는데, 제안대군이 후사 없이 죽은 후에는 그 터에 새로 사당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 미혼으로 죽은 왕자/왕녀, 또는 후사가 없는 후궁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P.99)
"이 근처는 수송동인데요, 이곳에 조선의 기틀을 세웠던 정도전의 집이 있었습니다."
-> 현재 서울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조선시대 인물의 유허 표지판은 거의 모두가 고증없이 세워진 엉터리입니다. 대부분은 1970년대 시사 편찬 당시 마을 주민들의 증언 따위를 기초로 해서 지목된 지점이거나, 그 이전 일제시대 경성부사를 집필할 때 'XX정 XX번지 어귀였다고 한다" 식으로 기재된 것을 정확히 그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방 후 완전히 착오한 것들입니다. 127쪽의 윤선도 관련 내용이나, 160쪽의 성삼문 집터 관련 내용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저에게는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P.101)
"1906년에 민족주의자 이용익이 세운 보성고등보통학교는 1927년 초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1927년 혜화동으로, 지금은 강남으로 교사를 옮겼지요."
-> 이용익이 세운 학교는 관립 보성중학교였습니다. 이것이 일제시대에 여러차례의 소유권 이전을 통해 중앙학원 소속의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고계학원 소속의 보성중학교로 나뉘게 되는데, 보성중학교는 해방 후 고등학교로 전환되어 현재 서울 송파구에 있는 그 학교가 맞고, 보성고등보통학교는 성북구 안암동으로 이사하여 현재의 고려대학교가 됩니다.

(P.112)
"그래서 1992년 옛 지명을 되찾아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파고다공원으로 불렀죠"
->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파고다공원'이라는 명칭이 이 공원의 공식 명칭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건립 당시부터 유지된 이 공원의 정식 명칭은 '탑동공원'이었습니다. 다만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공원을 자주 파고다공원이라 불렀고, 60년대 이후 공원 옆에 파고다 아케이드가 들어서는 등, 여러모로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이 자리잡다보니 마치 이것이 공원의 공식 명칭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P.121)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목 이병도 박사는....."그래서 차라리 유학을 갔지""
-> 이 부분은 완전히 말이 안되는데, 출전이 궁금하군요. 이병도는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해서 1919년에 졸업했고,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에 개교했습니다.

(P.153)
"안동별궁의 일부는 민씨의 별장이 있었던 고양 C.C.에 버려지다시피 했다가"
-> 안동별궁 정화당 등이 옮겨진 장소의 정확한 이름은 경기도 고양시 한양컨트리클럽입니다.

(P.155)
"작가 미상, <인형왕후전>"
-> 오타입니다. 인현왕후전.

(P.159)
"이 학교 출신의 조용만이 쓴 "경성야화"에 목조 2층의 낡은 교사가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금 남아있는 건물이 그때 그대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일단, 조용만의 '경성야화'는 오류 투성이의 책이라 웬만한 레퍼런스용으로도 잘 쓰이지 않는 책입니다. 그냥 회고록이다보니 아무래도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겠지요. 현재 남아있는 구 경기고교 본관은 1938년에 신축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입니다. 조용만이 1910년대에 수학했을 당시의 구 경성고보 본관은 1935년에 철거되었습니다.  다만, 경성고보의 '구 본관', 즉 조용만이 수학하기 전에 본관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본래 구한말 관립 한성중학교로 건축된 건물은 현재 정독도서관 경내의 서울교육사료관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P.164)
"조선 말 전통 한옥의 모습 그대로라는 백인제 박사의 한옥을 구경합니다."
-> 백인제 가옥은 본래 친일파 한상룡이 1913년 무렵에 신축해서, 1928년 무렵 근처의 '산업은행 관리가'로 이사하기 전까지 거주하던 건물을 해방 후에 백인제 일가가 구입해 이사온 것입니다. 조선 말 전통 한옥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원형 기둥이나 2층 사랑채 등등에서 소위 화양식 구조가 많이 나타납니다.

(P.168)
"하지만 100년 전 이곳은 그저 구석진 산꼭대기에 불과했습니다."
-> 이미 계동과 안동 일대는 조선 중기 이후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시인 유희경이 살던 집터가 바로 중앙고등학교 언저리였습니다. 정확히는 중앙고등학교 담장 건너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신선원전 부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 본인도 이미 1910년대 전반부터 현재의 중앙고등학교 부지에서 겨우 50미터 떨어진 지점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아래에 '민족과 더불어 80년' 역시, 위에 언급한 '인촌 김성수전' 만큼이나 믿을 게 못됩니다.

(P.173)
"이런 속에서 윤심덕의 <사의 찬미>,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가 유행이었습니다."
->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 레코드를 들어보면 "이래도 한 세상~"하는 부분의 가사는 전혀 없습니다. 그 부분의 가사는 1960년 개봉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에서, 극중 최무룡이 술에 취해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후 언제부터인가 이 부분이 윤심덕이 부른 가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90년대까지 윤심덕의 원래 음원이 일반에 잘 소개되지 않은 영향이 큰 듯 합니다.

(P.179)
"1908년에 세워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니"
-> 현존하는 중앙고등학교 동관과 서관은 1921년에 완공되었고, 본관은 1934년에 불타버린 것을 1936년에 지금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인데, 1908년은 어느 건물을 뜻하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P.183)
"삼청동하면 으레 솟을대문 있고 중문 있고 행랑채 낀 양반 대갓집만 생각합니다만, 걸어 올라가기 힘든 산동네는 아무래도 가난뱅이 차지입니다."
-> 이 부분은 조선시대의 삼청동과 일제강점기 이후의 삼청동을 착각하신 듯 합니다. 조선시대의 삼청동은 삼청 계곡 아래, 현재의 상명대학교 입구부터 가회동 권역 평지 지대 대부분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실제 행정구역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의 도시계획에 의해 암반 지대였던 현재의 행정구역 삼청동 일대 (조선시대의 소격동, 화동, 팔판동 일대)가 폭파되고 건축업자들에게 불하되면서, 싸구려 주택들이 마구 들어서게 됩니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언급된 삼청동이 이 곳입니다.

(P.201)
"그러나 운현궁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재정적 문재를 해결하기 위해 부분 부분이 팔려나갔습니다."
-> 운현궁의 건물들이 민간에 매각되고 불하된 것은 1950년대 이후입니다. 본격적으로 현재의 경역만 남기고 건물 대부분이 팔려나간 것은 1967년의 일로, 이 때 운현궁에 거주하던 박찬주 여사와 옛 왕족들이 사업 실패로 인한 파산 위기를 모면하고자 일본 대사관 측과 삼성물산 측에 각각 건물을 매각했습니다. 일본 대사관 측에 불하된 건물 (이로당)은 현재도 일본 대사관 경내에 '운니동 김승현가'라는 지정 명칭으로 남아있고, 삼성물산 측에 넘겨진 건물들은 철거되었지만 그 중 아재당 건물 일원은 다시 모 양조회사의 사장이 사들여 조립해 자기 사택으로 꾸몄습니다. 이 건물은 최근 해체되어 그 목재가 경기도 화성시 모 물류창고에 보관중입니다.

(P.203)
"지금도 관람시간과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지요"
->올해 5월 1일부로 창덕궁 전각권역에 대해서는 관람시간/인원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순종황제는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채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 조선의 멸망을 목도하고 말지요."
->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조선의 멸망을 목도(1910. 8.27.) 하고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 (1911.12.1)된 채 울분의 세월을 보냈다고 쓰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P.205)
"조선인의 거리인 종로를 통하지 않고 동대문까지 가기 위해서 일제가 1931년에 벌인 일입니다. 더불어 창덕궁에 기거하는 왕이 종묘로 가는 행차를 욕보이려는 속셈도 있었죠."
-> 사실 현재의 율곡로 구간은 이미 대한제국기부터 건설 계획이 있었고 (공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무려 종묘를 이전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1914년부터 구체적인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순종황제의 완강한 공사 거부로 1926년 순종이 승하할 때까지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순종 승하 후부터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순종 사후/종묘제례가 폐지된 후에 공사가 이루어 진 것이기 떄문에, 왕이 종묘로 가는 행차를 욕보인다는 의도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P.209) 
"1920년대 일제가 신작로 사업을 벌이면서 가로수를 처음 심거든요"
-> 서울 시내에 가로수를 처음 심은 것은 1934년부터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로수라는 개념은 구한말 부터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조영 가로수는 양주군수였던 홍태윤이 1901년 무렵 서울 홍릉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219)
"학림다방. 별명은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 낡은 계단에서부터 50년의 시간이 느껴집니다."
-> 1960년대-70년대에 학림다방의 별명은 과거 신문기사들을 따르면 "36강의실","외래강의실"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또한 원래의 학림다방 건물은 1983년에 지하철 4호선 혜화역 공사로 철거되었고, 현재의 학림은 1984년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새롭게 출발한 것이니 50년의 시간 운운하는 부분도 그렇게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주제넘지만 써보았습니다. 강호 제현들의 추가와 수정, 지적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책을 쓰신 유진숙 작가님에게도 간만에 가벼우면서도 속이 꽉 찬 글을 읽게 해주셨다는 점에 정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책 잘 읽었습니다. 

덧글

  • 2010/12/02 13:3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