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0~12일 전라북도 고창 알바 후기....(다량의 떡밥 함유!) by 진성당거사

지금은 지워버렸습니다만, 지난 12월 11일 저녁, "모종의 이유로 전라북도 고창에 내려와 있다"는 글을 썼었지요. 그 후로 한동안 그 이야기를 쓰려고 쓰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은 근 한달이 다 되어서야 이렇게 올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12월 초, 지금은 퇴갤하신 自XX愛님의 전화를 받은 것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이 현재 일하고 있는 어느 박물관 전시기획 업체에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고등학교가 새로 건립중인 '민족교육'을 컨셉으로 하는 박물관 프로젝트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인데, 이곳에 있는 자료를 정리할 일손이 좀 모자라니 시간을 조금 내어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침 떄맞춰 다른 곳에서도 자료 정리를 도와달라는 연락을 거의 동시에 받았기에 다소 망설였지만, 결국은 自모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2월 10일 아침 첫 차를 타고 전라북도 고창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전 10시 30분부터 12일 정오까지 고창고등학교 미술실에 보관되어 있는 옛 도서관 장서들과 몇가지 민속유물 등들을 정리하고 목록화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일개 고등학교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들이 잔뜩 있더군요.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책장 위에 쌓인 저것들은 무엇인가....?

여유당전서 (신조선사판, 정인보 교열) 와 주역언해로구나.

여유당전서 외에도 담헌집, 성호사설 등 다수의 신조선사 간행 전집들과, 주역언해, 시경언해, 두시언해, 퇴계집, 율곡집, 소학언해 등등, 다수의 고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고서들의 경우, 장서인이나 수결, 배접지 등등에 있는 글씨 등으로 미루어 이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옛 향교의 고서들을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 절반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일제강점기 초기 (1914년 ~ 17년 사이)에 조선총독부가 주자소 등지에 보관되던 옛 활자와 목판들을 이용해 인쇄한 책들도 더러 있습니다. 

잡다하게 쌓여있는 책들의 모음. 앞쪽에 있는 책들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간행된 문학전집류이고,
그 뒤로 보이는 책들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단행본들입니다. 

일제시대에 미국에서 구입해 들여왔다는 그랜드피아노. 다리 한 쪽이 부러지고, 몇몇 강선들은 끊어져
소리가 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그럭저럭 연주는 가능한 정도의 상태입니다.

피아노의 부러진 한쪽 다리 대신 기대어 놓은 옛 도서관 건물의 주춧돌.
연호를 깎아 훼손시키기는 했지만, 소화 16년, 즉 1941년에 이 도서관 건물이 세워졌음을 알려줍니다.

일본어 단행본들 클로즈업. 이들 가운데에는 그 유명한 암파문고나 평범사 전집 등등
온갖 책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대학교 수준의 전문 서적들도 상당수 있었구요.

지금은 헐려 사라졌다는 고창고등학교 6.25. 전몰학생 위령비 비명.
다른 사람도 아닌 '말당' 선생의 글입니다.

국립박물관 소장품 조사목록. 1952년 당시 서울 국립박물관에서 한국전쟁 중 있었던 피해 상황에 관해 
조사했던 목록집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왜 지방 고등학교에...?

오구라 신페이의 기념비적인 1935년 논문 "향가 및 이두의 연구".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책인 건 분명합니다.

연희전문의 교수였던 W.C. 루퍼스가 쓴 "한국 천문학사". 백낙준의 서문이 들어있습니다.
와다 유지가 촬영해 기록으로 남긴 옛 서운관 관측자료, 고려대 박물관의 혼천시계 발견 당시의 모습 등
희귀한 사진자료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남경 친일 괴뢰정권의 수반이었던 왕징웨이의 자서전. 
국내에서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아닙니다.

왕징웨이 자서전의 속표지.

"일본의 교육정신과 이퇴계". 선린상업학교 강사 다카다 세이지(高田誠二)가 1934년에 쓴 책입니다.
"퇴계의 사상이 일본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는 식의 주장 (떡밥?)을 내세운 최초의 책이죠.
서술되어 있다시피, 이율곡과 격몽요결에 대한 내용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책 화보 부분에 실린 "이퇴계 선생 초상." 이 초상화는 일제시대 몇몇 자료에서 언급되는
경성산부인과병원장 구도 다케시로(工藤武城)가 소장했던 그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그림을 누가 언제 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에서 유행했던
화양풍 화법으로 그려진 걸로 보아서 시대가 그리 올라가는 그림은 아닌 듯 합니다. 

충격과 공포이율곡이다 그지깽깽이들아!

이 그림은 1926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선 고래의 명현들 초상화를 수보(修補)하는" 문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본화가 와다 산조(和田三造)에게 의뢰해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후 이 초상화는 강릉 오죽헌으로 이안되어 1974년까지 오죽헌 옆의 제각에 모셔졌다가,
1975년에 '오죽헌유적정화사업'에 의해 우리가 5천원 권에서 볼 수 있는 이종상 화백의 그림으로 교체되면서
사라져 지금은 행방을 알 지 못합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두둥!
"이퇴계의 노래" (!)

악보 부분 접사.

가사 부분 접사.




하지만 진정한 떡밥 모음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이 책, 황의돈의 "중등 조선역사" (1924).
발행 연도는 1946년으로 되어있지만, 1924년의 책을 그냥 원래 판형 그대로 찍은 복각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정말 무수한 떡밥 도판들이 가득 들었으니.....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있었다는 단군 초상화 사진과,

살짝 환빠스럽기까지 한 "삼국시대 초기지도"

그에 못지 않은 "삼국시대 중기지도"

백률사 이차돈순교탑비와 "영락대왕릉비문"

그러나 진짜 떡밥은 바로 이것!

이것은 바로 을지문덕의 석상 사진! 
....이라고는 하는데 너무 해상도가 흐리멍텅...ㅠㅠ

사진 위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속전에 을지문덕 석상이라 하야 안주서문외 지중에 뭇쳣더니 경술년 9월에 저자가 안주 인사와 공모, 굴출하야 안흥학교 교정에 봉안하엿슴." 

이 석상의 존재는 일제강점기에 제법 알려졌던 듯, 몇몇 신문/잡지 기사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매천야록에도 기록이 있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10월 5일자에서 "을지문덕 석상 출현" 보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별건곤] 1929년 8월호에 김진구 (金振九)가 쓴 "북대 (北隊)"라는 르포 기사에서 이 석상을 묘사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百祥樓 - 天下第一景이라고 하고 십흔 그 달락을 하직하고 도라서다가 大門바로 뒤에서 乙支公의 석상을 拜謁하엿다. 農學校 구내에 잇다는 말을 김원장에게 드른 듯 한데 천만 뜻밧게 여긔서 보게 되엿다. 喜幸이다. 榮光이다. 어느 時代에 만드러 노은 것인지 넙적한 花崗岩에다가 乙公의 화상을 그려서 조각한 것인대 돌이 삭어 바스라 젓고 웃도막이 부러진 것을 가만이 올려 안첫다. 甲胄를 갓춘 우에 飛鎗, 大弓 빗겨 들고 금투구 눌러 쓴 그 알에로 鳳眼毫髮 위엄잇서 當年 장군의 胸藏萬兵, 臨陣對敵하든 그 기개와 그 雄略을 역역히 말하고잇다. 또 후배의 懦弱無氣力한 것을 꾸중하는 듯도 하다.

또 애류 권덕규 역시 [삼천리] 1935년 8월호에 "명장과 차 일전 (名將과 此一戰)" 이라는 을지문덕에 관한 기사를 쓰며 이 석상에 관한 언급을 남겼습니다.

또 頓씨 家乘에 公의 墓는 平壤西의 大寶山 南쪽 玄岩山에 있다 하얐고 지금에까지 그 자리를 指點하야 아는 이 많으나 歲久崩頹하야 墓인지 아닌지 모르게 된 것은 큰 유감이다. 유감이 어찌 이것뿐이랴. 公의 초상도 傳치 못 하얐다. 또 頓씨 家乘에 公의 석상이 石多山 層岩上에 있드시 漲水로 말미암아 海底에 떨어저 들이가매 그 近傍 村民들이 畵工 安夢鸚을 청하야 公의 상을 그리어 祭하얐다 하얐는데 淸川江水에 倒仆한 公의 석상을 근년에 발견하얐으나 이것좇아 頭面이 破壞되어 보는 이로 하야곰 눈물을 지우게 한다.

여하튼, 이 석상이 지금도 이북에 남아있는지, 궁금하군요.
 
강감찬의 초상화(!)
지금 낙성대에 모셔진 그 초상화는 절대 아닙니다.

최충의 초상화 (!)

지금 전해지는 그림과는 사뭇 다른 "이태조 어진"
이건 함흥 준원전에 있던 그림과도 다르고, 궁중에서 그려진 어진으로 보기에는 약간 필력에
딸리는 것도 있는 듯 해서 아마 민간에 전해지던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고백"
미국으로 망명한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리루예바의 자서전을 번역한 책입니다.
한국일보 외신부장이었던 정연권이 번역했고, 한국반공연맹자유공론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사실 이 책의 내용 중에 그닥 '반공'스러운 건 없는데 말이지요.

스베틀라나 알리루예바의 사진 -  "저자 근영"

강철의 대원수께서.....접...접문(接吻)을(!!!!)

우리 그루지아 인간백정에게도 저런 늘어지는 면모가....; 

'리대통령각하 85회 탄신기념 현상당선문장집', "태양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민족의 태양"였고, 이기붕 의장이 "민족의 달" 이었던 시절의 씁쓸한 잔해입니다.

이 불쏘시개스런 책의 서문. 현상문 모집에 무려 1788편의 글이 공모되었답니다!

이들 글의 심사위원들은 이헌구, 김말봉, 모윤숙, 양명문, 윤석중.
아니나 다를까, 일제강점기부터 행적이 그닥 깨끗하지 못한 분들이군요.

본격_빅브라더_우리_리_대통령.jpg

이런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확실히 북쪽보다 
개명이 훨씬 빨랐다는 사실에 저절로 안도하게 됩니다.

으으음.....;;

"그 날을 위하여 우리의 한 일은 무엇입니까?"
.
.
.
.
.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국력이 북한으로 넘쳐 흐를 때 통일에의 문은 열린다."

이제 대한민국의 국력은 북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통일에의 문은 요원해 보입니다.
1978년에 발행된 박정희대통령연설문 전집 속표지.

이건 쉬어가는 차원에서 올리는 사진.
1955년에 나온 "아메리-폰- 실용영어회화"의 한 페이지입니다.

이 영어회화 책은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어회화 책 중 하나였는데, 심지어 유니버셜 레코드의 협찬으로 축음기용 영어회화 레코드를 만들어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레코드를 몇 장 갖고 있습니다.)


이런 꽁트가 중고등학생의 영어 교재에 실리던 시절이 있었나봅니다그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저를 가장 깜짝 놀라게 만든 물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9, 10, 11판. 각각 1875년, 1901년, 1911년에 발행된 판본입니다.
19세기의 백과사전을 국내에서 찾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브리태니커 11판은 항목 작성자들과 편집자들의 면면이 다 상상을 초월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마지막 유산"으로 불릴 정도의 넘사벽 퀄리티를 자랑하지요.

9판과 10판은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장서를 기증받은 것인데, 11판의 경우는....

이 학교의 창립자인 일본인, 
마스토미 안자에몽 (升富安左衛門) 선생이 기증한 책이더군요.
당시 일본 국내에서도 극히 구하기 힘들었던 브리태니커를 이렇게 선뜻 내놓았던 걸 보니, 
과연 당시 식민지 조선에 있던 평균적인 일본인들에 비해 다른 사고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시간이 없어 거의 살펴보지 못했지만, 이곳 도서관에는 교토의 어느 절 장서라는 장서인이 찍힌
일본 에도시대 고서들 (가령 안세이 4년이라는 간기가 찍힌 책 등등)도 상당수 있는데,
아마 마스토미 선생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스토미 안자에몽 기증본" 장서인 접사.


남는 시간에 고창 군내를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제가 묵은 숙소는 군청 사거리 맞은편에 있는 '온천장'이라는 작은 여관인데, 
이 여관에서 바로 큰 길 하나만 건너면 고창읍성과 판소리 박물관, 그리고 동리 신재효의 생가로 알려진 초가집이 있지요.
일하기 전, 새벽 여섯시 반부터 아홉시 사이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둘러보았습니다.


동리 신재효 고택. 사실 집의 대부분은 헐려 없어지고 지금 남은 것은 집의 사랑채로 쓰이다
일제강점기에 고창 경찰서 관사로 쓰이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막나가는 안내문안,
"일제는 민족정신 말살의 목적으로 신재효 선생의 집을 훼손하고, 뒷마당의 연지를 메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나..."
일개 초가집에 손 댄 것이 무슨 민족정신 말살이랑 상관이 있을런지.

게다가, 이 집이 과연 신재효 선생의 집이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고창읍성 앞 비석거리 한 켠에 이끼와 때를 묻어가며 훼손되어 가는 어느 석비를 볼 때 말이죠.

조선성악연구회가 1935년에 세운 "통정대부 신공 재효 유허비."
유허비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이 비석이 세워졌을때 신재효 선생의 생가는 이미 세상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비석은 지금 판소리 박물관과 고창 읍성 사이 한 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풀숲에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한데,
훼손 상태가 퍽 심합니다. 뒷면의 비문은 이끼가 잔뜩 낀데다 전쟁 때 생긴듯한 총상이 수 군데 있어 판독이 어렵습니다. 
누군가 이 비석을 좀 구체적으로 조사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창 읍성의 북문인 공북루. 성벽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내의 거의 모든 목조 건물들은
대부분 1990년대에 새로 복원된 것들입니다. 이 성문 하나만 조선 중기에 지어진 모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창의 객사(客舍)인 모양지관 (陽之館).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2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거의 산꼭대기나 다름없는 곳에 객사를 지었다는 사실에 조금 의문이 듭니다.

여담이지만, 이곳 고창읍성의 관아 건물들에서는, 관광객이 접근하면 어디엔가 설치한 센서가 작동해서, "이곳은 ........" 식의 안내 방송이 자동으로 나오는데, 새벽녘에 찾은 터라 어둑어둑한 탓에 처음 이 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습니다.


공북루 앞에 있는 척화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서울 척화비와 더불어 그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척화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창 읍성 - 신재효 고택 주변의 가로수 보호시설물. 판소리 연행 모습을 묘사한 투각문이 인상적입니다.


1935년에 지어진 옛 조양여관 (등록문화재 제 325호). 현재는 조양식당으로 영업중입니다. 
문화재청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사진과 비교해볼 때, 최근에 보수공사를 했는지
일부 부재가 새로 교체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본식 목조건물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던 듯, 꽤나 엉망으로 보수가 진행되었더군요.


조양식당의 벽체 모습. 외벽 목재를 상당수 교체한 듯 합니다.



여하튼, 겨우 이틀 남짓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도 호강하고,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돈도 벌었으니, 진정 일석이조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自XXX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덧글

  • 2011/01/04 13:2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시쉐도우 2011/01/06 21:57 #

    무려 1875년판 브리태니커라....돈만 된다면(+둘 곳만 있다면) 무리를 해서 구입하고 싶은 수준이군요. 놀라운 내용을 잘 보았습니다.
  • hyjoon 2011/01/08 19:41 #

    소중한 경험을 하고 오셨군요. 무엇보다도 희귀한 고서들을 접하고 오신 것이 부럽습니다.
  • 바람불어 2011/01/10 10:40 #

    고등학교 도서관 수준을 훨씬 뛰어넘네요. 이해안갈 정도입니다^^
    그리고 공북문은 밑에 석축같은 거 안쌓고 저 상태가 북문인가요?
  • 진성당거사 2011/01/10 10:43 #

    저 모습 그대로 북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지방의 읍성에서 자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도 저게 고등학교 도서관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더군요. 이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86년에 옛 학교 교사를 헐고 새로 교사를 신축하면서 책의 상당수를 폐지로 버렸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실제로 전집류인데 책의 짝이 안맞는 것이 부지기수더군요.
  • 한단인 2011/01/10 10:52 #

    아니.. 저 고등학교는 무슨 던전이라도 됩니까? 무슨 보물들이...
  • 캐스트너 2011/02/11 13:27 #

    오랜만에 와서 책 사진 실컷 구경했어요. 돌돌이님 포스트 유쾌하게 잘 쓰시네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2/23 16:49 #

    와아~정말 신기합니다.

    그나저나 을지문덕 석상!!!! 사진이 안 보이다니...이. 이. 이. 무슨...

    근데 저런게 정말 있긴 있었군요. 흐음. 신기신기~
  • 덕수 2011/05/08 20:59 #

    앗!!! 제가 다니는 학교네요~^^
    작년에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들 보는데 정신팔렸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쉽네요...
    덕분에 학교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되서 기분이 좋네요~^^
    참...저 피아노는 고창고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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