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설날맞이 특집) 1934년 조선産 코미디, "소문만복래"! (+신불출傳) by 진성당거사

오늘은 본격 설 맞이 특집으로 제가 소장한 레코드 가운데, 1934년에 오케 레코드에서 발매된 "스켓취" (Comedy Sketch),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레코드를 같이 들어보실까 합니다. 1930년대 조선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과, 역시 당대의 유명 연극배우인 성광현, 나품심, 그리고 나운규의 1926년 영화 "아리랑" 에서 여주인공 영희 역을 맡아 유명해진 신일선이 함께 출연했습니다.

음원 녹음은 단순하게 제 축음기에 마이크를 걸어놓고 한 것이라서, 음질의 해상도는 그닥 좋지 않습니다. 물론 제 힘으로도 얼마든지 제대로 복각할 수도 있지만, 혹시나 이 녹음이 저작권법에 저촉될 수도 있고, 또 언젠가 여력이 되면 제가 직접 신불출의 만담 레코드만 모아 복각 CD를 한 장 내볼까 하는 생각도 했기에 지금은 이렇게만 올려둡니다.

신불출의 만담 레코드는 당대 기준으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이 팔렸는데, 1933년 2월 오케레코드에서 처음 발매된 그의 대표작, "대머리 (공산명월)" (흔히 '익살맞은 대머리'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은 발매 시작 보름만에 2만 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레코드의 경우, 본래 1934년에 녹음된 레코드이지만 1940년대 초반에 재프레스된 반입니다. 당대의 인기 레코드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발매가 되었던 판은 꽤 드문 편인데, 이 정도이면 가히 신불출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레코드 양면에 걸쳐 총 7분 정도 녹음되어 있습니다. 


레코드 사진

신불출 (申不出, 1905/1908 ~ 1971?)


오케 레코드 1934년 1월 신보. (Okeh 1611-A,B (K811/812))
스켓취 (*'스겟취'는 당대 기준으로도 오타입니다) "소문만복래" (성광현 作)
(*레코드 프레싱에 따라 이 작품을 성광현 작/신불출 작으로 달리 표기했습니다.)
배역 : 신불출 (장인), 나품심 (장모), 신일선 (딸), 성광현 (바보 사위)


어떠신지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1930년대 조선사람들이 즐기며 희희락락하던 코미디가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불출이 "자, 이제 우리 이제 시시껄렁한 얘기는 다 던져버리고, 소문만복래라고 했으니 말이야, 어디 한번 웃어나보자꾸나"라고 말하는 부분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든 코미디가 추구해야 할 근본자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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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잠깐!

과연 우리는 이 레코드에 등장한 1930년대 연예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아마 이름조차 처음 들으신 분들이 많으실 듯 합니다. 흘러간 시절의 연예인들에 대해 이토록 놀랄 만큼 아는 사람이 적다는 건, 그리고 그들의 생애에 대해 제대로 기록한 사람들도 없다는 건 뭔가 서글프기만 합니다. 하다못해 미국이나 일본, 심지어 중국에서도 그 옛날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 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이들 가운데 특히 신불출의 프로필을 짧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글이 스크롤 압박이 될 것 같으시니 관심 없으신 분들은 패스하시길.




신불출은 1930년대와 40년대 조선 최고의 인기인이었는데도, 그 생년과 성장배경이 정말 명확하지가 않은 인물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해방 후 월북한 뒤 수십년 동안 그의 이름이 '월북인사'로 낙인찍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것도 한몫 하겠습니다만, 결정적으로 당대의 자료들에서 확인되는 프로필조차 아무도 종합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제가 찾아보고 종합한 내용을 위주로 기술해 보겠습니다. (*따라서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단 그의 본명조차 명확하지 않아서, 자료에 따라 신영일, 신흥식, 또는 신상학 등으로 엇갈립니다. 생년은 1905년 또는 1907년 설이 있는데, 대체로 1905년 쪽이 우세합니다. 원로 연극배우 故 고설봉이 신불출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그가 1996년에 '예술세계' 지와의 회고담 가운데 남긴 말에 따르면 신불출은 자신보다 여덟살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설봉은 1913년 生). 

신불출은 경기도 개성 남대문 밖에서 대대로 소백정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가족관계나 그밖의 성장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정보에서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경해 연극활동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신불출이 남긴 글이나 레코드 등에서 파악할 수 있듯 (*그 유명한 '대머리 공산명월'에서도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하이 개그가 있습니다!), 그의 학력은 절대 얕지 않았던 듯 합니다. 매일신보 1935년 1월 3일자의 신불출 관련 기사에서는 그가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고 기록했고, 고설봉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학비가 없어 중퇴....수백 종의 외국 책을 탐독하고 수천 편의 각국 시를 외워 읊어대는 기억력의 소유자" 였다고도 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첫발을 디딘 극단이 김소랑이 이끌던 취성좌였던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취성좌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던 상업 극단의 하나로, 1917년부터 1929년까지 지방을 순회하며, 극작가 이서구, 윤백남 등을 영입하여 초창기 신극 무대의 주도권을 잡았던 연극단체입니다. 몇몇 증언에 의하면 그는 취성좌의 본무대가 아닌 막간극에 나와서 만담을 처음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성좌에서의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을 듯 합니다. 1929년에 취성좌가 해체되면서, 그는 조선연극사, 신무대 등의 극단들을 전전하며 연극배우 겸 작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신불출은 1930년에 신무대의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에서 자신의 마지막 대사를 갑자기 자기류 (自己流; 요즘 말로는 애드립)로 갈아치워서는,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 여러분, 삼천리 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 사람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말해버리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는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결국은 서울 무대에 절대 서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난 뒤 극단 문외(門外; 말 그대로 '문 밖'으로 쫒겨났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위의 부분은 고설봉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고설봉의 증언이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그토록 대단한 인기를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일제강점기에 신불출이 단 한번도 서울에서 공연을 갖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그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바로 오케 레코드의 사장 이철 (1903 ~ 1944)과 전속계약을 맺고, 1933년 2월 오케 레코드의 1회 신보로 그의 만담 레코드를 여러 장 발매했을 때 부터였습니다. 오케 레코드는 당대의 음반사 가운데서도 굉장히 독특한 영업을 하였는데, 사실상 말만 레코드 사였지 연예인 기획사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실제 녹음작업과 생산 작업은 일본의 중소 레코드 업체인 테이코쿠 (帝國) 축음기상회가 담당했고, 오케 레코드 사는 음반의 기획과 영업만을 담당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이를 통해 음반의 제작비를 절감해서 당시 한 장에 2원 남짓 하던 타 음반회사와는 달리 50전짜리 염가 음반을 판매했던 것입니다. 이 레코드들을 통해 신불출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수많은 다른 레코드사에서도 여러차례 녹음을 하며 음반을 판매하며 일약 대스타의 자리에 군림하게 됩니다.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였고, 문외극단 단원들과 함께 지방 순회공연도 자주 열었으며, 동아일보 등의 언론사 등에서 기획하는 만담대회들에도 출연했습니다. 심지어 벽초 홍명희는 당시 연재중이던 "임꺽정"에 느닷없이 작중인물로 신불출을 등장시키기까지 했는데, 이는 신불출이 홍명희의 대머리를 빗대어 만담을 한 것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장난질이었다 합니다.

신불출은 만담으로 인기를 몰았음에도 진지한 연극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의 레코드 가운데에는 "낙화암과 삼천궁녀", "낙랑공주와 마의태자", "일편단심 - 고려말엽 정몽주 실전(實傳)" 등의 사극도 다량 있으며, "견우 직녀" 등의 비극류도 있었습니다. 또한 "현하 극단의 실정을 논하여" (동아일보 기고문, 1932.8.28 ~ 30), "극예술협회에 보내는 공개장" 등의 연극 관련 논설에서는 퍽 날카로운 필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시조도 써서 여러편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대중가요 작사/작곡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해방 후 경기민요로 둔갑해 알려지기도 한 "노들강변" 입니다

아울러 신불출은 만담에 대한 자신의 기본 신념에 대해서도 글을 여럿 썼는데, 그 중 한 편을 여기 당대 표기법 그대로 옮겨봅니다.


雄辯과 漫談

申不出

 

『삼천리 (三千里)』, (1935. 6.)

 

漫談은 講演이 않임니다. 演說도 않임니다. 또 才談도 않임니다. 그러타고 작난은 더구나 않이올시다. 漫談은 漫文, 漫畵, 漫詩, 漫謠등등으로 섯부른 一丸의 것이로되 어느 무엇보다도 그 諧譃性 (Humour)의 縱橫無盡함과 그 諷剌性 (lrony)의 自由奔放한 점을 특징으로 삼는 그야말노 불같고 칼같은 말의 藝術임니다. 말은 마음의 그림입니다. 생각을 表現하는 연장의 하나로 말같이 끔즉 대단한 효과를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매양 말 그것이 마음의 왼통을 그대로 表現식혀 주지 못하는 것임을 毋論 또한 벨느고 벨너서 맨드러진 그 말조차 다 하지 못하는 끝에 말은 究意 지금 세상에선 변변치 못한 녀석일 박게 없습니다.

 

이러틋 不完全한 그리고 탐탁지 못한 말을 가지고서 이루워지도록 마련된 이 漫談이란 것은 그리 쉬운 노릇이 못되는 것임니다. 실상 漫談같이 어려운게 없으니 제 아모리 群衆心理를 操縱하기에 能通한 재조꾼이라도 단 한사람의 말재간으로써 그많은 聽衆으로 하여금 장시간동안을 喜怒哀樂의 세계에서 無我夢中으로 漫遊하게 하기는 難難之中 難인 것이외다. 漫談은 반다시 재미라는 것은 전제로 하는 것이로되 그러타고 神通奇拔한 美辭妙語를 羅列하는 것 뿐으로서 漫談이 되는 것이 않이니 과연 現代人의 가슴을 찌를만한 칼같은 迫力이 있는 그엇던 眞實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임니다. 漫談은 원래 朝鮮에는 없엇든 것임니다. 소위, 才談이란 것이 있기는 하엿으나 그것은 이 漫談과는 아조 比肩도 못할만치 本質的으로 다른 것이외다. 이 才談이란 것은 아마 東京에 있는 萬歲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다만 우슴 본위로 空虛한 內容을 가진 것임니다. 언제인가 한번 西洋사람이 筆者를 보고 漫談을 英語로는 무어라고 하느냐고 뭇기에 "아이딀-톸-(Idle Talk)"이라고 대답햇슴니다만 西洋에도 漫談이란 것은 없는가 봄니다.

 

그럼 이 漫談이 어데서 비롯된 것이냐하면 그 故鄕을 日本에다 두고 잇는 것인데, 東京서도 이 漫談이 시작된지가 불과 5년이라는 짧은 歷史를 가진 것임니다. 漫談이 東京서 처음 발생된 동기는 落語나 萬歲나 講談 따위와 같은 혹은 너무 저급하고 혹은 너무 頑固한 다 낡어진 在來藝術形式의 傳統을 깨트려 버리고 여긔에 대립이 될만한 가장 嶄新하고 가장 輕快明朗한 表現形式인 舞臺藝術로 마련된 것임니다. 그러면 이 漫談을 즘지한 사람은 누구냐하면 德川夢聲, サトハチロ-등의 諸人이라 하나 이들은 하나의 漫文客은 될지언정 漫談客은 않임니다. 시방 東京서 漫談家라고 自他가 공인하는 사람으로서는 大辻司郞이라고 하는 사나인데 當代의 인기를 한 몸에 다 실고었는 모양임니다. 筆者는 朝鮮에다가 漫談을 처음 輸入식혀놓은 사람의 하나올시다만은 결단코 大辻司郞類의 漫談을 고대로 模倣한 것이 않이니 筆者가 일즉 엄청나게도 불리한 客觀的 情勢아래 刻刻으로 萎薇不振하는 朝鮮劇界를 떠나 그러케 까다롭지 않이하고도 될 수 있음 즉한 좀더 새롭고, 조촐한 돈 않들고도 손쉽게 될 수가 있는 舞臺形式이 하나 없을 가하고 西洋것을 冊子에서 硏究해 보고 中國이나, 東京것을 직접으로 實際見學도 하야 본 결과, 드듸여 이 漫談이란 것을 創案해 가지고, 비로서 朝鮮에다 그 첫 시험을 해밧든 것임니다. 남의 것을 배호는 것은 내것을 맨들기 위해서만 價値가 잇는 것임니다.

 

우리는 惠澤받지 못한 文化의 遺産속에서 양상한 자기 그림자를 발견할 때마다 늘 外國의 先進文化를 적당히 模倣하여 또한 정당한 眞理를 追從하야 自己文化의 領域을 廣大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겟지만 自己文化의 創造的 任務가 결코 模倣과 追從에만 있는 것이 않이고 좀더 한거름 나아가서 가장 참된 批判의 칼노써 料理된 營養劑가 않이여서는 않될 것이니 요즈막 海外文學을 연구하는 이들 중에서 흔이 볼 수 있는 無批判的 模倣에서 가저오는 섯투른 솜씨가 맛츰내 그 민중으로 하여금 消化不良症에 呻吟케 하는 罪過가 하나 둘이 않인 점으로 보아 그들의 反省을 구하는 것이니 요컨댄 실제 朝鮮을 再認識하는 동시에 批判的 攝取로서의 再出發이 있기를 翹望하여 마지않지 하는 것임니다.

 

이야기가 너무 脫線되엿슴니다만 다시 本論으로 드러가서 그리하야 朝鮮서 시작된 漫談은 大辻司郞類의 漫談과는 아조 딴판의 것이라고도 할만치 두드러지게도 달니 된 것이니 그것은 그들의 입맛과 비위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때문이엿슴니다. 往往히 野談과 漫談을 구별 못하는 이를 보는데 野談과 漫談의 다른 점은 첫대 野談은 주로 野史를 중심으로 한 古談을 내용으로 하는 것임에 반하야 漫談은 주로 현대를 중심으로 한 實談을 내용으로 하는 점일 것임니다. 雄辯은 漫談이 않이외다. 그러나 漫談에는 雄辯이 없을 수 없는 것임니다. 또 雄辯은 講演이 않임니다. 그러나 講演에는 雄辯이 없을 수 없는 것임니다.

 

雄辯은 英語로 Eloquence라고 함니다. 또는 Oratory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흔히 演說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함니다. 雄辯은 무엇이나 맘대로 할 수 잇는 말의 武器올시다. 太陽같이 힘잇는 말로써 天下人心을 左右할 수 있는 이 雄辯은 능히 革命의 矩火가 되여 千載의 宮殿을 하로 아츰에 灰盡케 할 수도 있는 것이요 능히 戰爭의 홍수가 되여서 萬世의 社稷을 하로 저녁에 流失케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니 壯하다. 雄辯의 힘이여 너를 익일 자-그 누구이뇨? 엇던 學者는 말하기를 "이 폔(筆)이 銃釰이 되었으면" 하엿지만 筆者는 "그 銃釰이 雄辯이 되었으면" 하고 싶음니다. 雄辯은 멀-니 기리시아, 로-마의 共和政治時代에 뿌리를 박고 피여난 꽃인데 大盖 그 뒤에 雄辯이 발전되여 내려온 沿革을 볼 것 같으면 專制政治時代보다도 自由政治時代에 있어서 한층더 雄辯의 꽃이 만발하엿다고 하는데 그러나 雄辯이라고 하는 꽃은 自然草木과 다른지라 따뜻한 봄에만 피는 것이 않이요 치운 게을에도 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賢明한 現代人만이 가질 雄辯의 특징일 것임니다. 무릇 國民的 大事件의 해결은 잉크나 펜이나 총과 칼도 필요하겟지만 雄辯은 모든 것 보다도 항상 앞을 스는 것이외다.

 

오날은 新聞雜誌時代라고 하지만 筆者는 朝鮮은 雄辯時代라고 하고 싶습니다. 國民의 八割은 무식하니라 하고 말한 엇던 大政治家의 말을 오르지 承認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처지에서 하물며 가갸거겨(한글)을 금일에야 배우고 있는 朝鮮에서 新聞과 雜誌도 필요하겟지만 말노써 世上을 좌우할 수 있는 雄辯의 힘을 너무도 切實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봄니다. 세계가 시방 人本主義 文明時代로 推移하면서 있는 오늘날 시대의 推移를 솔직히 대표하는 雄辯家가 나와서 캄캄한 세상벌판에다가 새벽종을 울녀주기 바라기 마지 않이함니다.



그러나 일제 말엽이 되자 신불출의 코미디 무대는 각박해져가는 시국 탓이었는지 점차 시들해져갔고, 1942년 이후로는 그 어떤 기록에서도 신불출의 공연 내역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와중에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주위의 강권에 자신의 이름을 에하라 노하라 (江原野原)로 만들었는데, 말 그대로 "에헤라 놀아라"를 가지고 말장난을 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한 뒤 그는 다시금 만담가 활동을 재개했고, 아울러 조선영화동맹, 조선연극동맹 등의 좌익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6월 11일, "6.10. 만세사건 20주년 기념"으로 서울 국제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영화동맹의 공연에서 당시 인구에 두고두고 회자된 "태극기 만담"을 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라는 것은 "태극기의 청색은 소위 우요 적색은 좌다. 그리고 팔괘는 연합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은 좌우가 갈리우고 연합국은 언제나 우리나라 주위에 있다. 그러니 미국과 소련은 필히 조선에서 전쟁을 벌일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이 나온 순간 좌중에 있던 우익 청년들에 의해 신불출은 크게 구타를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백인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몸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로 그는 '태극기 모독사건'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때 신불출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고 전합니다), 결국은 1947년 초 월북하게 됩니다.

그 후 북한에서 신불출은 퍽 대단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한국 전쟁 때는 대남 선무방송에 참여했으며, 이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내며 공훈배우로 선출되었습니다. 1957년에는 신불출 만담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소장을 맡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습니다. 이 무렵 그의 만담은 두꺼운 만담집으로 묶여 출판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서울의 전력난을 풍자한 `서울의 전기세', 미국을 비난한 `승냥이' 만담은 주민들 사이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신불출은 정치적인 배경에 남로당과 연관을 두고 있었고, 또 한설야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탓에, 결국 한설야 계열이 몰락한 1960년대 중후반 숙청당하고 말았습니다. 북한 중앙방송위원회 극작가로 활동한 장해성 등을 비롯한 몇몇 북한 측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불출은 이 무렵 북한의 폐쇄적인 체제를 풍자하는 만담을 공연하는 등, 김일성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을 자주 저지른 끝에, 마침내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 가까스로 복권되었으나 이미 뇌출혈이 심해 거의 활동을 못하다가 얼마 못가 사망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북 모두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기에 활동했던 수많은 문예인사들의 인생을 살펴볼 때마다, 정말로 재능이 넘쳐났던 사람들이 사상과 정치적인 역량에 휩쓸려 묻혀버린 안타까운 꼴을 볼 때가 너무도 많은데, 신불출의 경우도 그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만큼 한국 현대사에 굴곡과 비극이 산재해 있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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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들꽃향기 2011/02/01 13:40 #

    "에하라 노하라 (江原野原)로 만들었는데, 말 그대로 "에헤라 놀아라"를 가지고 말장난을 친 것"

    -> 천성적으로 개그의 자질을 가지신 분이군요 (....) 역시 농을 치려면 신불출 급은 되어야 합니다. ㄷㄷ 그나저나 많은 월북 지식인, 예술인사들이 결국 남로당계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숙청된 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입니다.
  • 행인1 2011/02/01 13:53 #

    비운에 간 당대의 인기 개그맨이었군요.(당시가 상당히 팍팍한 시대이긴 했지요)
  • rumic71 2011/02/01 14:02 #

    30년대라면 저작권에 걸릴 걱정은 없을 듯 합니다. 요새야 월북인사라고 해도 그렇게 걸고 넘어지지도 않고... 그건 그렇고, 라쿠고나 코단이 저급하다고 까는 패기는 대단하군요.
  • 초록불 2011/02/01 14:18 #

    신불출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월북해서 숙청당한 내막은 처음 알았네요. 분단이 가져온 비극, 그리고 경직된 북한 체제가 예술을 어떻게 죽였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漁夫 2011/02/01 14:33 #

    당시에 정치에 휘말려 저렇게 끝이 암담했던 인물이 많았지요...

    뻔하지만 자주들 잊는 점이, 지금 저희들은 복받은 겁니다.
  • 바람불어 2011/02/01 18:41 #

    놀랬습니다. 전 일제시대 연예인이 저 정도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만담을 했다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직접 본적도 있지만 그땐 그냥 재미있는 말장난(제 어릴땐 이미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시골장터의 개그가 되었죠)

    식민지 해방 분단 전쟁이라는 풍파를 고스란히 다 맞으며 산것도 극적이면서 현실적이고요.

  • SoftWish 2011/02/01 19:34 #

    예전 일제시대의 예술인-정확히는 연극인-을 다룬 `동양극장`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재룡과 이승연이 주인공이었죠.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차홍녀, 임선규, 문예봉, 황철과 같은 이름들을 알 수 있었죠. 신불출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신에선 황철 역의 이재룡이 38선을 넘어 월북합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사라저버린 예술인들의 일대기가 잘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슈타인호프 2011/02/01 21:49 #

    헉, 그 에하라 노하라가 저분 창씨한 이름이었습니까;;;;
  • 2011/02/02 01:1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2/02 13:49 #

    한국 현대사의 암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군요.ㄱ-
  • 파란바람 2011/02/02 17:03 #

    초딩 때 애들이 장난으로 태극기 원 부분이 남북한을 의미한다고 말했었는데 비슷한 드립이 저 때도 있었다니.ㄷㄷㄷ
  • FrontierJ 2011/02/04 13:01 #

    저작권 연한이 50년이라고 들었으니.. 30년대 작이면 저작권 문제는 별로 없을듯하네요.
    게다가 신불출 본인이 없고 레코드사도 없어진 상태니 이건 저작권이 없다고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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