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친일 논란

문제의 주인공, 김재원 선생 (1909 ~ 1990)
내가 황평우 소장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언론 플레이 때문이다.
황평우 소장은 자기의 주특기라는 문화재 반환 운동을 진행한다면서도 정작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관계도 잘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난번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 혜문 스님과 함께 '명성황후 카펫'이 없어졌다고 설레발쳤지만, 그 물건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 방송에 나왔던 충무공 쌍룡검도 모르긴 몰라도 아마 국박 어딘가 쳐박혀 있을게다.
게다가, 그 분이 가끔씩 걸핏하면 꺼내드는 아델리아 홀 FBI 보고서 따위는 부디 성경 떠받들듯 믿지 말았으면 한다. 6.25때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해외로 무단반출된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당대의 FBI 보고서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반중력 물질을 만들었다는 헛소리도 버젓이 있다. 연방정부기관의 문건이니 그 내용을 전부 다 신뢰해야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 아닌가.
황평우 선생은 친절하게도 문제의 '조광' 지 글 전문을 기사에 첨부시키기까지 해줬다.
이 글을 다시 전재해본다. 한번 직접 읽어보라.
예술과 정신김재원<조광>1943년 10월호 62~66쪽
나의 반생중(半生中)에 그 중 인상(印象)이 깊은 것은 처음 나의 은사(恩師) 「헨체」교수(敎授)를 만날 때 일이었다. 「안트워-프」시(市) 교외지(郊外地) 「베르헴」에 인접(隣接)한 「수렌보르그」가(街) 28번지(二十八番地)의 교수(敎授)의 연구실(硏究室)이었었다. 이층(二層)으로 된 서양가옥(西洋家屋)으로는 나즐막하게 된 집 아래층(層)이다. 안내(案內)로 나온 하녀(下女)가 문(門)을 열고 불란서(佛蘭西)말로 무엇이라고 말하나 불란서(佛蘭西) 말한마디 못하는 나는 그저 모르는 체 하고 독일어(獨逸語)로 선생(先生)을 뵈올 수 있느냐고 하였더니 유창(流暢)한 독일어로 대답(對答)한다.학자(學者)의 집이 다르군! 하녀(下女)까지 수개국(數個國) 말을 하다니!
주인공(主人公)을 대(對)하기 전(前)부터 마음껏 감탄(感嘆)을 하고 연구실(硏究室)로 안내(案內)되었다. 코가 이상(異常)하게도 뾰족하고, 눈이 날카로운 오십가량(五十假量)되는 지금 한참 일 할 수 있는 중년(中年)을 지낸 학자(學者)이다.
가르킨 의자(椅子)에 앉은 나는 위선주위(爲先周圍)를 살펴보았다. 이게 대체(大體) 무슨 광경(光景)인가
이 방(房) 안 책(冊)궤, 책장에 가뜩 쌓인 수 천권(數千卷)이나 되는 책(冊)은 전부(全部) 한적(漢籍)이 아니면 일본(日本)에서 출판(出版)된 책(冊)이 아닌가.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간행(刊行)인 조선고적도서보고(朝鮮古蹟圖書報告)의 전부(全部),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또는 경도대학고고학보고(京都大學考古學報告), 고전충주씨저고〇편백권(高田忠周氏著古〇篇百卷), 남경중앙역사언어연구원연구보고서(南京中央歷史言語硏究院硏究報告書) 등 등(等 等)이다.
아마도 나의 눈이 둥그렇게 되었었는지, 교수(敎授)가 빙그레히 웃으면서 책(冊)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곁방(房)에 있는 책(冊)을 보라고 하면서 카텐을 드는데, 역시(亦是) 이곳도 가뜩 들어있다. 이 방(房)에 있는 책(冊)은 고서(古書)이기 때문에 그 중(中)에도 귀중(貴重)한 도서(圖書)는 이 철궤(鐵櫃) 안에 넣었다고 하면서 십여개(十餘個)의 이런 철제책궤(鐵製冊櫃)를 가르킨다.
이야기가 조선(朝鮮)에 관(關)한 도서(圖書)에 옮기자 교수(敎授)는 일어나 열쇠로 책(冊)장 문을 열고, 이 삼 매(二三枚)의 사진(寫眞)을 보여준다. 한 자 다섯치에 다섯치가 될 가하는 불상(佛像)의 사진(寫眞)이다. 첫째 사진(寫眞)을 볼 때 기억(記憶)에 솟아나는 것은 내가 십여 일 전(十餘日前)에 최군(崔君)에게서 받은 석굴암(石窟岩)의 그림엽서(葉書)이었다. 바로 그 엽서(葉書)에서 본 불상(佛像)이 지금 사진(寫眞)으로 보는 이 불상(佛像)이 아닌가. 「아! 이것은 우리 석굴암(石窟岩) 불상(佛像)이군」 태연(泰然)히 웨쳤다. 그것은 나에게는 낯익은 조각(彫刻)이란 말이다.
이리하여 위선(爲先) 나의 면목(面目)을 유지(維持) 할 수 있음을 다행(多幸)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 불상(佛像)은 알 수가 없다. 후(後)에 알고 보니, 그것은 지금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 있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금동여의륜관음상(金銅如意輪觀音像)이다. 교수(敎授)는 이 불상(佛像)을 손에 들고, 새삼스렇이 감탄(感嘆)하여 말을 못하고 한참이나 보다가 나더러 어떠냐고 의견(意見)을 묻는다. 무엇이라고 감상(感想)을 말하여야 되겠는데 그것이 왜 좋은지 알 수 있나 하기야 이 선생(先生)이 이렇게 감탄(感嘆)하고 또 신라(新羅)고 고려시대(高麗時代)를 막론(莫論)하고 문화정도(文化程度)가 상당(相當)하였다고 하는 것만은 상식(常識)이니 이 불상(佛像)의 아름다움은 물론(勿論)이겠으나, 그래도 왜 좋은지 또 나의 느끼는 바를 말하여야겠는데, 「좀 코가 높은 것 같군요」
사실(事實) 코가 서양인종(西洋人種) 같이 좀 높은 것 같기로 이렇게 감상(感想)을 말하였다. 그러나 선생(先生)은 아무 말도 없고, 다음 사진(寫眞)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여러 가지 설명(說明)을 하셨다. 이삼년 후(二三年後), 내가 이 선생(先生)과 가치 앉어 지난 일을 회상(回想)할 때, 선생(先生)은 그때 「좀 코가 높은 것 같군」하는 소리를 듣고 겨우 웃음을 참었다는 말슴을 하였다. 불상(佛像)의 코가 동양인(東洋人)보다도 높고 안 높고는 이 예술품(藝術品)의 가치(價値)를 좌우(左右)할 아무 것도 안된다.
생각하면 이런 일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한 민족(一 民族)의 문화(文化)를 살필 때는 무엇보다도 그 민족(民族)이 맨들어 낸 예술품(藝術品)을 본다. 따라서 가령(假令) 일본민족(日本民族)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소위(所謂) 지식계급(知識階級)에 있는 사람이 일본인(日本人)이 자고(自古)로 맨들어 낸 일본예술품(日本藝術品)을 전(全)혀 감상(鑑賞)할 수 없다는 것은, 일본문화(日本文化)의 무엇인지를 모르고, 따라서 일본정신(日本精神)의 진〇(眞〇)를 알지 못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석굴암(石窟庵)의 불상(佛像) 같은 것은 동양예술사(東洋藝術史)에서 중요(重要)한 지위(地位)를 차지하는 것이고, 과거 반도인(半島人) 선인(先人)이 남겨놓은 수다(數多)한 문화적(文化的) 업적(業績) 가운데서도 그 중(中) 훌륭한 물건(物件) 중(中)의 하나를 후인(後人)으로서 이러한 예술품(藝術品)을 앞에 놓고 「좀 코가 높다」라고 말했는 것은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동양(東洋)사람이 공연(空然)히 서양문화(西洋文化)에 심취(心醉)하는 나머지, 서양(西洋)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알면서 동양의 그 이상(以上)의 예술가(藝術家)의 작품(作品)을 폐리(弊履)와 같이 버리고 돌보지 않은 예(例)는 일일(一一)히 매거(枚擧) 할 수가 없다. 그 중(中) 제 일(第一) 심한(甚)한 예(例)는 산서성(山西省)의 대동운강석불사영암(大同雲岡石佛寺靈巖)과 용문(龍門)의 빈양동외(賓陽洞外)의 제영감(諸靈龕)의 석불(石佛)들이다. 이 부처님들은 극진(極盡)한 공양(供養)은 못받았어도 수백년간(數百年間) 안치(安置)되여 계시든 동양예술(東洋藝術)의 조종(祖宗)이고, 세계(世界)의 어떠한 조각(彫刻)보다도 뒤지지 않는 불상(佛像)들이다. 그러나 중국인(中國人) 자신(自身)들은 이들의 가치(價値)를 알지 못하고 따라서 외국인(外國人)들도 그곳에 그런 예술품(藝術品)이 파묻처 있는 줄을 알배없다. 내가 기억(記憶)하건대는 불란서(佛蘭西)의 중국학자(中國學者)로 유명(有名)한 「샤반」Chavanne씨(氏)가 이곳을 지내치다가 비로소 이 경이(驚異)할만한 예술품(藝術品)을 보고 사진(寫眞)을 박어 학계(學界)에 발표(發表)하여 수백년(數百年) 동안 망각(忘却)되였든 불상(佛像)은 세계(世界)에 소개(紹介)되였다.
중국인(中國人)에게도 이런 예술품(藝術品)이 있는 줄을 알게 된 서양인(西洋人)들은 한편 놀래고, 한편 기뻐하면서, 시작(始作)한 것이 중국불교(中國佛敎) 예술품수집(藝術品蒐集)이었다. 이때까지 중국예술(中國藝術)이라면 자기(磁器) 밖에 모르던 그들이다.
자랑할 만한 예술품(藝術品)이 세계(世界)에 알려진 것은 좋다만은 그 결과(結果)는 수백(數百)을 산(算)하던 이곳의 불상(佛像)은 무참(無慘)히도 어떤 것은 목을 따고 어떤 것은 몸덩어리채로 돌에서 찍어내고 하여 도적(盜賊)질하기에 쉬운 불상(佛像)은 거의 전부(全部) 없어저서, 지금 구미(歐米)의 어느 박물관(博物館)치고 운강(雲岡)이나 용문(龍門)의 불상(佛像) 한 두 개 소유(所有)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초(當初)에 촬영(撮影)한 사진(寫眞)을 놓고 보면, 어디있든 불상(佛像)은 지금 유육박물관(紐育博物館)에 있고 어느 불상(佛像)은 지금 파리(巴里) 루-불박물관(博物館)에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게 꿈까지 되었다. 이 불상(其他 藝術品도 같으나)을 외국인(外國人)들이 도적해가는데는 역시 중국인(中國人) 자신(自身)이 조수(助手) 노릇을 한 것은 물론(勿論)이다. 하나 목을 떼여오는데 십원(十圓)이고 오십원(五十圓)이고 받었을 것이나 지금은 이 불상 한 개에 수천원(數千圓), 수만원(數萬圓)의 가격(價格)이 불어있다.
이 중국예술품 도적(盜賊)질로 치부(致富)한 중국인도 상당히 많으나 그 중에 유명한 것은 파리에 근거(根據)를 준 노(蘆)라고 하는 미술상(美術商)이다. 나도 수 년 전에 그를 찾은 일이 있는데 파리 시내 중요한 거리에다 중국식(中國式) 집을 짓고 자동차(自動車) 세, 네 대(臺)를 놓고, 지점(支店)은 윤돈(倫敦), 유육(紐育), 보스톤 등지까지 버려놓은 거상(巨商)이다. 이런 중국미술품전문상(中國美術品專門商)은 세계각국(世界各國)에 그 근거(根據)를 둔 것을 모조리 합(合)하면 수십이 될 것이고, 그 중 제일 큰 것만으로도 이 십여를 헤일수 있다. 한때는 이들 장사떼들이 북경이나 남경같은 중심지의 호화(豪華)러운 일류(一流)호텔에 진(陣)을 치고 자금(資金)은 물론 수만금(數萬金)을 가지고 각지(各地)로 중국인 조수(助手)를 파견(派遣)하여 예술품을 모아 드리고 있었다. 가령(假令) 안양(安陽)에서 이러이러한 고물(古物)이 북경으로 들어온다는 정보(情報)가 들어오면 이들 상인(商人)들은 각기(各其) 경쟁(競爭)하여 별별수단(別別手段)을 다 써가면서 자동차로 「오-로바이」로 고물(古物)을 가지고 온다는 사람을 먼저 만나서 손에 넣을려고 애를 쓴다. 주목(注目)할 것은 이 방면(方面)에도 유태계(猶太系)의 상인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예술상배(藝術商輩)들의 암중활약(暗中活躍)이 심(甚)하기 중국 같은 데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것이 잘 발견(發見)도 안된다는 것이 큰 이유(理由)이지만은 중국처럼 자기(自己) 물건(物件)을 지킬 줄 모르는 데가 드문 까닭이다. 자국(自國)의 예술품을 잘 지키고 애껴 오래전부터 그 유출(유출)을 금(禁)한 것은 일본이다. 이 혜택(혜택)으로 현재(現在) 국보급(國寶級)의 예술품은 거의 전부가 국내에 머물러 있다. 내양(奈良)이니 경도(京都)이니 하는 곳의 박물관을 보면 과연(果然) 그 위관(偉觀)에 황홀(恍惚)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명치초년(明治初年)에 외국에 나간 미술품도 상당히 많어 후에 와서 수 배(數倍)의 가격으로 다시 사드린 일이 많고 지금도 사드리는 일이 있다고 한다.
물론 미술품이라는 것은 보존(保存)만 되면 어느 나라에 있든 그것은 인류(人類)가 생산(生産)한 보물(寶物)이다. 그러나 석벽(石壁)을 뚫고 맨든 부처의 목을 떼여간다든가 하는 야만(野蠻)의 행동(行動)으로 그것이 외국의 〇〇(수집, 호사)家의 사유품(私有品)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통〇(痛〇)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누구를 할 것 없이 우리의 살림은 여유(餘裕)가 없어 좀 더 우리의 생활(生活)을 미화(美化)하기가 힘든 형편(形便)에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쓰고자 사는 이 집 같은 데는 서재(書齋) 하나 맨들 수 없이 협루(俠陋)한 곳이고, 뜰이라고는 장독때, 수도(水道)와 신탄(薪炭?)으로 가뜩 찼으니 이런 주택(住宅)을 미화(美化)하여 좀 살림다운 살림을 할래야 도저(到底)히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생활(生活)이 살풍경(殺風景)한 것이 여유(餘裕)가 없는 까닭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간혹(間或) 부유(富裕)한 집 응접실(應接室) 같은데 들어가면 위선(爲先) 눈에 띄우는 것은 주인공(主人公)의 확대(擴大)한 사진(寫眞)을 걸어 놓은 것이다. 주인공(主人公)이 얼마나 자기(自己) 얼굴에 자신(自信)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 한가지로 벌써 주인(主人)의 敎養程度를 알 수 있는 때가 많다. 꽃 한폭?, 깨끗한 그림 한 장(張) 없이 사는 우리들의 생활(生活)의 근본원인(根本原因)은 소학시대(小學時代)부터 진정(眞正)한 정조교육(情操敎育)의 결함(缺陷)에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近來) 정조교육(情操敎育)에 치중(置重)한다는 말은 자주 들으나 그 결과(結果)는 어떠한가. 소학교(小學校), 중학교(中學校)에서 창가(唱歌)나 도화(圖畵)를 얼마 가르키고 고여(高女)에서는 자수(刺繡)를 가르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창가(唱歌)나 도화(圖畵)가 과연(果然) 얼마나 정조교육상(情操敎育上) 효과(效果)를 내는지 첫째 의문(疑問)이지마는 제일(第一) 웃으운 것은 고여(高女의 자수(刺繡)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생도(生徒)들이 허비(虛費)하는 시간(時間)과 정력(精力), 학부형(學父兄)들의 부담(負擔)이란 여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신(代身) 맨들어낸 것은 일분(一分)의 가치(價値)가 없는 속악(俗惡)한 물건(物件) 뿐이다. 생도(生徒)들은 이것으로 인(因)하여 정조(情操)의 향상(向上)은 〇사(〇捨)하고 정당(正當)한 미(美)에 대(對)한 판단력(判斷力)을 그르치게 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고 또는 어느 정도(程度) 공예품(工藝品) 제작가(製作家)가 될 필요(必要)는 없다. 그보다도 예술(藝術)에 대(對)한 감상력(鑑賞力) 이것을 필요(必要)로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程度) 누구가 가져야 할 것이다. 최고(最高)의 교육(敎育)을 받고도 석굴암불상(石窟菴佛像) 앞에 서서 남이 좋다니 과연(果然) 좋은 조각(彫刻)이거니 하고 마는 것은 진정(眞正)한 교육(敎育)을 받았다고 할 구 없지 않은가. 이러함에는 학교교육(學校敎育)에 예술사(藝術史)를 넣을 필요(必要)가 있다고 한다. 중학교(中學校) 같은 데서는 도화(圖畵)와 병행(併行)하여 한 시간(時間) 쯤 동양예술사(東洋藝術史)를 가르키는 것은 감상력(鑑賞力)을 길으는 외(外) 또 동양(東洋)의 정신(精神), 이어서는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될 줄 안다.
확실히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나치 시대의 독일을 유학한 지식인의 시대적 한계가 분명히 묻어나오는 글이다. 당대 일제를 의식한 부분도 분명히 있고.
그런데, 전반적으로 볼 때, 이 글이 황평우 소장의 말처럼, "전체 논조로 볼 때 이 글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과 내선일체론을 전제로 쓰여진 글"일까? 일본인 운운하는 부분은 딱 두 마디인데. 그나마 첫번 문장은 가정법에 지나지 않고, 두번째 문장도 소극적이지 않나? 진짜 친일 행적이 뚜렷한 사람들의 당대 글과 비교해보면 이건 장난거리도 못된다.
"초대 중앙박물관장으로서 그의 공적만 부각시킬 게 아니라 과오도 냉철히 밝혀 재평가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나도 이전 포스팅에서 김재원 선생의 한계에 대해 지적한 바는 있었지만, 별로 길지도 않은 글의 딱 두 문장을 갖고 친일 행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
그렇게 따지면 황평우 소장이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간송 전형필에게도 친일 전력이 '풍부'하다. 글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형필은 1942년 9월에 경성에 있던 지원병훈련소에 지원병입소자 전원의 간이보험금 명목으로 5,000원을 헌납했던 일도 있거든. 그걸 황평우 소장께서 아실려나 모르지만.
그리고 왜들 국박 관장들 선대의 친일논란을 꺼내드는지. 이건무 선생이 관장이었을때도, 이제 김영나 선생까지도.
가만히 보아하니 이 기사도 아마 3.1.절 맞이 떡밥이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제발 이러지들 말라고,




덧글
2011/03/04 20:53 #
비공개 덧글입니다.저런식으로 '잘못된 정보'로 애국운동 했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를 하는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