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축음기-2)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육성녹음 (1890) by 진성당거사

1890년 영국 런던. 

당시 일간지 세인트 제임스 가제트 (St. James's Gazette) 지에 실린 작은 기사 한 토막이 영국에서 작은 스캔들을 터뜨립니다. 1853년의 크림 전쟁 참전용사들 상당수가 극빈자가 되어 비참하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기사였습니다. 이로 인해 참전용사들에 대한 연금을 법으로 제정하도록 하자는 여론이 빗발쳤지만, 당시 영국 정부의 전쟁장관은 의회에 나가 그럴만한 예산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윽고 처음 여론몰이를 한 세인트 제임스 가제트 지와 몇몇 인사들이 힘을 모아 "경기병 여단 구호 기금 (The Light Brigade Relief Fund)"[1]를 조직하게 됩니다만, 정작 모금 실적이 극도로 저조한 탓에 돈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고 쩔쩔맵니다. 

그런데, 이 기금에 가담했던 인물 가운데에는 그 유명한 탐험가인간말종 헨리 모턴 스탠리 (Henry Morton Stanley)가 있었는데, 그가 당시로서는 정말 엄청나게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당시 최첨단의 발명품이요, 과학의 최고 결정체라 칭송되어 마지 않던, 에디슨의 축음기를 사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스탠리는 에디슨의 영국 측 대변인이었던, 조지 에드워드 구로 대령 (Colonel George Edward Gouraud, 1841 ~ 1912) [2]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사실 영국에서 최초로 에디슨의 '완성형 축음기' (Perfected Phonograph) [3] 를 구입한 것도 다름 아닌 스탠리였습니다. 


헨리 모턴 스탠리가 구로 대령을 통해 구입한 에디슨 "완성형 축음기", 1888년. 대영도서관 소장.
원시적인 형태의 습전지를 사용해 모터를 돌려 왁스 실린더에 소리를 기록하는 구조였습니다.

 
구로 대령 (오른쪽)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새로 산 축음기를 테스트해보고 있는 헨리 모턴 스탠리 (왼쪽).
1888년 10월 5일.


스탠리와 구로는 이 축음기를 가지고 이미 수 차례나 대중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888년에 런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열린 핸델 페스티발을 녹음하기도 했고, 유명한 작곡가 아서 설리번,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미국의 전설적인 흥행사 P.T. 바넘,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인 제롬 나폴레옹, 그리고 전설적인 영국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 등등의 연설을 녹음하기도 했으며. 모금운동이 벌어지기 직전에는 런던의 명물 중 명물인 빅 벤 시계탑의 종소리까지도 녹음해 대중에게 공개했던 것[4]입니다.

이런 화려한 전적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이런 대중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일에 축음기를 사용하겠다고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스탠리와 구로는 이 축음기를 가지고 세 개의 왁스 실린더 레코드를 만들었습니다 [5]. 첫번째는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이 자작시 "경기병 여단의 돌격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를 낭독한 녹음이었고, 두 번째는 크림 전쟁의 참전용사인 나팔수 마틴 랜프리드 (Martin Landfried)가 당시 불었던 돌격 나팔을 재현한 녹음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1890년 7월 30일에 녹음된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육성 녹음이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육성 녹음 듣기 [6]

나이팅게일은 이 녹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When I am no longer, even a memory, just a name, I hope my voice may perpetuate the great work of my life. God bless my dear old comrades of Balaclava and bring them safe to shore. Florence Nightingale."

"내가 더 이상 없어 (나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도, 나는 내 목소리가 내 삶의 크나큰 업적을 영구화시켜주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내 친애하는 발라클라바의 옛 동료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물가로 고이 인도하시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여담이지만, 이 녹음이 만들어진 1890년 당시 70세였던 나이팅게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보전만 하고 있는 '불구'의 몸이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근무했을 당시 이렇다할 외상이나 정신적 쇼크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그 후 1910년 사망할 때까지 근 50여년을 완전히 자리보전으로 일관했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병리학자들이 그녀가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자리보전만 하고 살았는지를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녹음을 남길 무렵의 나이팅게일의 모습, 1890년.


어쨌든, 이미 세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나이팅게일의 육성이 녹음되어 공개되자, 당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료 시연회 10여차례[7]를 통해 기금 운동의 목표가 다 채워진 것은 물론이고, 스탠리와 구로에게도 꽤나 짭짤한 이익이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녹음은 구호기금을 위해 녹음된 사상 최초의 녹음이 되었습니다. 지금 같으면야 웬만한 재난재해/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음반을 만들어 판매한 뒤 그 수익을 기금으로 돌리는 일이 그렇게 보기 드문 일은 아닙니다만, 1890년의 상황에서는 정말 "과학의 쾌거"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육성 녹음은 그 후 헨리 모턴 스탠리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1904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유산과 더불어 실린더 레코드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스탠리의 친구인 찰스 존스턴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레코드는 다시 1909년에 구로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구로는 에디슨의 영국 자회사이자, 당시 영국 최대의 축음기 제조업체였던 에디슨-벨 레코드 축음기 유한회사 (Edison-Bell Phonograph Limited)의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구로는 스탠리가 만든 다른 실린더 레코드들도 모아놓고, 이것들을 마호가니로 만든 커다란 특제 캐비넷들에 넣은 뒤, 흡습지를 끼워놓고 납으로 봉인해 보관했습니다. 그의 이런 조치 덕택에 [8] 이들 녹음들이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2세기가 흐른 오늘날 우리들도 들을 수 있게 된 셈입니다.

1912년에 구로가 숨을 거둔 뒤, 이들 실린더 레코드들은 세상에서 잊혀졌습니다. 에디슨 벨 주식회사도, 시장을 완전히 석권해버린 디스크 레코드[9] 탓에 서서히 시장에서 주도권을 뺏겨가다 마침내 1926년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옛 명사들이 실린더에 녹음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풍문으로만 세상에 돌아다닐 뿐, 실제로 그 녹음을 들어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거의 없었습니다.

시간이 훌쩍 흐른 1932년, 망해버린 옛 에디슨-벨 주식회사의 시설과 지분을 사들인 기업가 하워드 플린 (Howard Flynn)은, 구로 대령의 옛 저택으로 그가 죽은 뒤 폐가가 된 리틀 멘로 (Little Menlo) 에서 뜻밖의 발견을 합니다. 구로의 옛 침실 뒷쪽 벽장에서 두 개의 큰 마호가니 캐비넷을 발견한 것입니다. 납으로 봉인된 그 캐비넷의 뚜껑에는 "중요한 실린더 원판들, 1888 ~ 1891"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노리끼리하게 변색된 갈색 왁스 실린더 레코드 80여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실린더 중 두어개는, 벽장 윗쪽의 보일러 관이 터지는 탓에 흘러내린 누수로 인해 녹아내려버렸지만, 전반적으로 이들 모두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하워드 플린이 발견한 실린더 음반들 중 일부


플린은 집에 돌아와 옛날 실린더 축음기를 하나 찾아낸 뒤, 상자에 있던 실린더를 손에 집히는 대로 하나 꺼내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미 죽은지 오래인 저 유명한 숙녀분이, 무덤 속에서 들리는 듯한 흐릿한 소리와 함께 말을 건네는 것"을 듣고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고, 이윽고 엄청난 발견을 했다는 사실에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지 20여년만에 나이팅게일의 육성 녹음이 재발견된 것이었습니다. 하워드 플린은 이 레코드를 곧장 조심스럽게 녹음 스튜디오로 가지고 가서, 이 녹음을 디스크 레코드에 복사한 뒤[10], "19세기 명사 시리즈 (1)"이라는 부제와 함께 1935년 5월 세상에 출시했습니다. 이번에는 마침 그때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대영제국 암 캠페인 (British Empire Cancer Campaign)"에 수익이 전액 기증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육성녹음 실린더 원본. (검은색 상자 안에 들어있는 하얀 원통)
 대영도서관 소장. 

1939년에 하워드 플린은 그가 발견한 모든 실린더 음반들을 대영도서관 (British Library)에 기증했고, 그후 이 실린더들은 2005년까지 아무도 함부로 손대는 일 없이 깨끗하게 간직되어오다, 발달된 디지털 기술을 통해 깨끗한 음질로 복각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이팅게일 실린더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발견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왼쪽 끝부분 표면에서 매우 흐릿하지만 나이팅게일의 또 다른 육성이 남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제대로 녹음된 그 부분과 똑같았는데, 아마 1890년에 나이팅게일이 이 녹음을 할 때 말을 버벅거리는 바람에 이 부분을 녹여 지워버리고 새로 녹음을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 지워진 녹음은 음반 역사상 최초의 '별 테이크 (Alternate Take)'인 셈입니다.


<References>

[1] 지금이야 저 유명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The Charge of Light Brigade)"가 '크림 전쟁에서 벌어진 영국군 최악의 병크'라는 의견이 대세입니다만, 1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은 이들의 용기를 찬양하고 영웅시했습니다.

[2] 구로 대령은 본래 미국인으로, 남북전쟁에 매사추세츠 55여단 소속으로 참전해 미국 명예훈장 (Medal of Honor)을 수여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870년대 후반 에디슨이 전구 사업을 막 부풀리던 무렵 그에게 투자한 소수의 인물로, 투자의 성공과 함께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1885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서 런던 남쪽 노우드에 큰 저택을 지었는데, 이 저택은 영국에서 최초로 전화와 전구를 갖춘 집 (*진정한 얼리어답터의 원조!으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택의 이름은 '리틀 멘로 (Little Menlo)" 였는데, 물론 에디슨의 실험실인 멘로 파크에 대한 오마쥬였습니다. 

[3] 잘 알려져 있듯, 에디슨이 최초로 축음기를 만들어 낸 건 1877년입니다. 그러나 이 축음기는 틴 포일 (Tin Foil), 즉 납으로 만든 호일을 사용하는 거라 한번 녹음하고 재생하면 그걸로 끝인 아주 원시적인 장치였습니다. 에디슨은 이후 10여년 동안 전구의 개량에만 골몰해버렸고, 그 바람에 1888년에 이르러서야 보다 개량되고 보다 영구적인 녹음을 만들 수 있는 축음기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에디슨은 '완성형 축음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축음기는 훗날 '클래스 M'이라는 이름을 달고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제조 판매되었지만, 워낙 고가인데다 고장이 잦아 판매는 극도로 저조했고, 결국 에디슨에게 (첫번째) 파산이라는 쓴맛을 안겨주게 됩니다

[4]  이들 녹음들은 현재 모두 현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모두를 복사본으로 소장하고 있는데, 혹시 들어보실 의향 있으시면 언제든지 리퀘스트 주시길 바랍니다. ^^

[5] 1890년의 기술로는 왁스 실린더를 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초창기 실린더 레코드들은 거의 모두 그 자체가 하나하나 개별적인 녹음입니다. 실린더 음반이 유통되기 시작한 뒤에도 한참동안 복제 기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녹음을 하나하나 뜨는 중노동을 했습니다(!) 

[6] 두 번 반복됩니다. 첫번째는 제 소장음반인 1935년의 복각본이고, 두번째는 2005년에 디지털 기술로 다시 복각된 음원입니다. 

[7] 레코드 판매 대신 시연회 10차례였던 이유도 바로 위에 언급했듯, 레코드의 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시연회는 1890년대에 실린더 축음기가 보급된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8이 시기의 실린더 음반들은 천연 왁스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손으로 표면을 만지면 지문이 묻어 녹음을 훼손시키는 데다가, 더운 날 장시간 공기에 노출시키면 녹아서 흘러내리고, 습기가 차면 팽창하고, 물에 젖으면 녹고, 곰팡이가 표면에 서식해 녹음 자체를 아예 '먹어치우는' (!) 해괴한 현상까지도 벌어질 수 있는, 매우 연약하고 보관하기 어려운 녹음 매체입니다. 1890년대에 만들어진 실린더 음반들이 지금껏 거의 보존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1902년 초 에디슨이나 콜럼비아 사의 에드워드 이스턴 (Edward Easton) 등의 사람들이 유황을 섞은 개량형 왁스로 실린더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하기 전 까지 계속 나타났습니다.

[9독일 출신의 미국인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가 1888년 처음 디스크식 음반을 고안해냈고, 1896년부터 이들 음반들이 대량생산되어 판매되었습니다. 유통 초기 디스크 음반은 실린더 음반들에 비해 음질이 매우 열악했지만, 프레스 용 마스터 금형을 떠내어 이것을 마치 '와플 굽듯' 찍어 대량생산할 수 있고, 취급이 실린더보다 간편하다는 것 때문에 1900년대 말에는 이미 실린더음반을 시장에서 밀어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훗날 베타 비디오테이프와 VHS 비디오테이프의 경쟁과 유사한 양상이 아닐까 합니다. 

[10] 돌이켜보면 1930년대에는 과거의 역사적인 실린더 음반들이 하나 둘씩 디스크로 복각되어 보존되기 시작했습니다. 1888년에 녹음된 작곡가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 실린더나,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1900년대 실황연주를 담고있는 메이플슨 실린더 123매 등이 이 시기에 처음 복각되었습니다. 비록 당시의 허술한 기술 탓에 음질은 극도로 열악한데다 심지어는 가끔 원본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까지 주곤 했지만, 과거의 매체를 보다 접근이 쉬운 매체로 바꾸어 보존하는 움직임이 이렇게 일찍 나타났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카이브학'이 자리잡지 못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덧글

  • 플로렌스 2011/03/20 16:35 #

    유익한 글 잘 봤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새롭게 보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요. 마지막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 들꽃향기 2011/03/20 16:43 #

    잘 보았습니다. 왁스실린더에 녹음된 명사들의 목소리라니. ㄷㄷ 엉뚱한 얘기이지만 스탠리는 인간말종이 맞지만, 저런 부분에 있어서 '감각' 하나는 참 뛰어난것 같기도 합니다. ㄷㄷ
  • 한단인 2011/03/20 17:39 #

    전부터 궁금한 것이었지만 이런 레어급 자료들은 대체 어떻게 구하시는 건가요? 저번에 레코드의 경우는 소장하고 계신게 있다는 건 포스팅으로 알곤 있지만은....

    ...이건 그런 레벨을 초월하지 않았습니까?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