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썼던 포스팅은 확실히 내가 틀린 듯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자중자애님의 가르침으로 오기가 나중에 오잠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려증동의 논문에서 내린 결론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
이렇게 된 데에는 려증동이 고려사 본문의 인용문의 출전을 잘못 제시한 점도 있다.
려증동은 논문에 제시한 것처럼 악지 권 71의 기사가 아니라,
열전 간신편 권 125의 오잠 대목의 기사를 옮겨썼다.
밑에 댓글로 경군님이 제시하신 빠진 글자들은 그래서 생긴 현상.
저 인용문을 출전 확인도 없이 계속 인용해댄 학자들은 결국 고려사 원문 확인을 안 했다는 얘기일뿐.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너무 성급하게 글을 썼던 건 확실히 잘못이다.
애초에 논문 전체를 색안경 끼고 보다보니 이렇게 성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는데....
확실히 선입견이란 무서운가보다. 정말 반성해야할듯.
그냥 집에 와서 좀더 알아보고 글을 쓸 것을, 괜히 급하게 쓰느라.
제 글에 낚이셨던 분들이 혹여 있으시다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런데.....;;
국문학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은 꽤 아시겠지만, 고려가요 가운데 "쌍화점"이 고려 충렬왕 조에 승지 벼슬을 지냈던 오잠(吳潛)의 작품이라는 설이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었다. 그 설의 처음 주창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그 관계 자료를 찾아보니. 1968년에 한국어문학회의 "어문학" 지에 실렸던 논문, "쌍화점 고구(考究)"가 그 주장의 시초였다.
그런데 저자가............;;
두둥.....

하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훈민정음은 오구라 신페이의 위작입nida" 운운하는 그 양반이 처음 내놓은 학설일줄이야. 그 분의 글솜씨 답게, 논문 전체가 비문 남발에, "배달학"을 주장하는 사람의 글 치고는 정말 엄청난 비율로 외래어가 잔뜩 들어가 앉아 있는 게 특징이었다.
글을 잘 읽다보니, 결정적인 오류 하나가 눈에 확 뜨인다.

"쌍화점"("삼장(三藏)")과 "사룡사"의 창작 기원을 밝혀놓은 고려사 악지 권 71의 기록을 옮겨놓았다. 빨간 색으로 표시해 놓은 부분의 대목이야말로 려증동이 "쌍화점" 창작자를 오잠으로 고찰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일터다.
그런데, 정작 고려사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고 하니....

오잠이 아니고 오기 (吳祈)였다!
이건 국사편찬위원회 서비스의 오류가 아니다. 규장각 소장 고려사 악지 원문도 이렇다. 이 글자는 본문이라서 글자 크기가 애시당초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틀릴 수도 없는 글자다.

려증동이 이 부분을 잘못 보고 옮긴건지, 아니면 참조한 판본이 다르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일부러 그런 것인지 나는 배움이 짧아 잘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고려사를 내가 제대로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세세한 디테일을 많이 알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분명한 것은, 려증동의 이 논문이 가깝게는 2002년까지 주요 학술서에 인용되었고, 려증동 스스로도 이때 썼던 글의 내용을 전혀 바꾸지 않고 1980년대까지 계속 옮겨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추가) - 려증동은 1982년 쓴 소논문, "고려가요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고 있다. 이 논문은 1988년에 간행된 "고려시대의 가요 문학" (새문사 刊)에 실려있다.
쌍화점은....(중략)....고려 충렬왕 때 궁중악의 하나로 상연되었던 가극의 대본이었다. 지은 사람은 충렬왕 5년에 승지였던 吳潛이었다. 이 노래를 불러야 했던 사람은 궁중에 적을 둔 男粧別隊였다. 남장별대는 노래기생, 춤기생, 얼굴기생으로 편성된 여자배우다. 무대 이름은 香閣이었다....(중략)...무대가 뒤로 물러났으며, 장막을 지니고 있는 것. 고려 사회의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어지럽게 된 것은 충렬왕조부터였으며, 충렬왕조에 두드러진 것은 몽고풍이 들어온 것이다. 쌍화점 가극도 몽고풍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려증동의 논문이 나온 후 43년이 흘러가는 동안 고려가요 연구자들 중에 아무도 고려사 원문을 다시 들여다 볼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니겠지?
어쨌든, 나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혹여 경향제위 가운데 내가 놓친 부분을 알고 계신다면 바로 덧글로 써주시길 부탁드린다.
(* 그리고, "진성당거지X끼인지 할일도 없는 무직 개백수X끼" 식의 덧글이 올라온다면 가만히 안 놔둔다.)
덧글
다만, 려증동 씨의 인용문을 보면
1) 吳祈가 吳'潛'으로 되어 있음
2) 以管絃房太樂才人爲不足에서 '爲'가 탈락
3) 伎藝가 '技'藝로 되어 있음
4) 善歌舞者에서 '舞' 탈락
5) 敎閱此歌에서 '閱' 탈락
등 국편위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원문과의 차이가 보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많이 보이는 것을 보았을 때 려증동 씨가 참조한 고려사의 판본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려할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혹 고려사의 다른 판본에는 오기를 오잠이라고 한 것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정오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 성급하지 않은 판단이 아닐까요.
더구나 려증동은 글의 뒷부분에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오잠 관련 기록을 여럿 인용하면서 논의를 끝까지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고려사 색인을 믿어보자면 오잠과 오기는 활동 시기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이 주장을 적어도 1988년까지는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려증동의 논문 및 고려사 인용문은 다시 1996년에 나온 최용수의 "고려가요연구" (2002년 재간)에까지 그대로 실려있구요.
제목 문제라면, 디비피아의 원문 검색에서도 "척화점"으로 되어있습니다.
쌍화점이 아니라 '척'화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ㅋㅋㅋㅋㅋ
* 雙(쌍), 隻(척)
논문에 실린 이상 원문을 그 논문에 의지하는 것은 일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애초에 게재 결정을 내릴 때 심사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뭐, 안 봐도 비디오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