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건된 문화재를 중건이라 부르지 못하고........ by 진성당거사

본격 간만에 또 쓰는 선동글.....

얼마전 또다시 네이버 기사검색을 하던 도중에 또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오오 네이버 오오

"조선 대표적 건물인 방화수류정 (화홍문) 중건"
193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수원 화성의 북 수문인 화홍문이 1922년에 수해로 무너졌다가, 1932년 5월에 중건했다는 것이다. 수원 화홍문이야 기사에서도 나오듯 옛 대한제국의 지폐 도안으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로, 수원 화성을 대표하는 유명한 건축물인데, 정작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1932년이었다는 것이다. 1922년 8월의 수해로 석축이 무너지고 누각이 완전히 무너져 없어진 것을, 수원 읍의원이었던 차재윤이라는 사람이 몇몇 뜻 있는 사람과 힘을 합쳐 "수원명소보전회"라는 단체를 세우고 3000여원의 성금을 모아 새로 건립했다는 것이다.

설마설마해서 화홍문 관련해서 기사를 추가로 검색해보니, 1922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에 "화홍문의 파괴와 면 당국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화홍문의 파괴에 대한 아쉬움과 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수원면 당국자들에 대한 개탄을 담은 장문의 글이 투고되어있었다. 이런 것을 보아도 화홍문이 1922년 여름에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0년 후 중건되었던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그런데 현재 수원 화성에 대한 문화재청 안내문이나 또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다. 가령 네이버 백과사전의 정보는 이렇다.

수원 화성성역의궤의 내용만 전재해놓았을 뿐, 화홍문이 훼손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 자체가 없다. 화홍문은 지정문화재가 아닌 관계로 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에도 화홍문에 대한 별도 항목은 없다. 어쩌면 지정문화재가 아니라서 문화재청에서도 아예 신경을 안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80년 된 것을 200년 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건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못될터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멀쩡한 지정문화재 중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이를 속인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잘못된 정보는 바로잡고 고쳐야 할 것이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기재해놓으면 사람들은 이 유적이 원래도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또 잘못된 인상과 느낌을 받고 가기 마련이니까.

먼저 보물 제 5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제천 청풍 한벽루의 경우를 보자. 일단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정보는 이렇다.
현재의 청풍 한벽루 모습
 


일단 1985년에 본래 자리를 떠나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내로 이건되었다는 얘기가 한 줄도 없다는 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1972년 8월 2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자.

기사에서 "보물 528호 청풍 한벽루는 아예 홍수에 유실되는 비운을 당했고" 라는 구절이 보인다. 물론, 일전에 다른 포스팅에 썼다시피 "기사 내용은 50프로만 맞으면 된다"라는 말을 신문기자가 하던 시절이 70년대였으니, 이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곤란할 수 있다. 그런데, 한벽루는 정말 그 해에 완전히 유실되었다.

한국 문화재재단이 발간한 월간 "문화재" 1972년 8월-9월호 합본호에는 한벽루의 소실을 알리는 토막기사와 함께 완전히 무너져버린 한벽루의 사진이 세 장이나 실려있다. 아래 그 사진을 전재한다. (자료 출처 : 다음 카페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이렇게 완전히 다 무너져 내린 것을 사실상 주초석과 기단만 빼고는 몽땅 다 새로 지은 것인데, 이렇게 새로 지어진 건물을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라고 치켜 세우며 아직까지 지정문화재로 관리 보호하는 것은 무슨 생각인가? 설령 옛 모습을 그대로 되살렸으니 그 건축 수법이나 외형이 본래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들, 최소한 1972년에 붕괴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는 설명 한마디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이번에는 현재 등록문화재 87호로 지정된 서울 종로구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 (* 2004년 당시 첫 지정명칭은 "홍지동 이광수 고택") 에 대한 네이버 백과사전의 내용을 보자. (*등록문화재 관련 정보가 거의 다 그렇듯,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설명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맨 마지막 문장 두 줄에 주목. "이 집의 매입자가 개보수를 거쳐 복원했으나 다행히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근대화된 한옥 양식을 보여주는 문학적,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저 설명대로라면, 어쨌든 이광수가 거주했던 시절 이후 한번 손을 탔었지만 어쨌든 원형이 잘 남아있고, 문학적 가치와 건축사적 가치가 충분한 건물일텐데, 과연 그럴까?

여기 1960년대 말에 촬영된 이광수 가옥의 원래 모습과, 오늘날 모습을 담은 사진을 비교 차원에서 올려놓는다. 과연 이게 "원형이 잘 남아있는 건물"의 모습일지, 한번 스스로 판단해 보시라.

1967년경 촬영된 본래의 춘원 이광수 고택.

2004년 등록문화재 지정 당시의 모습. 
 

아니나 다를까, 이게 어떻게 같은 건물일 수가 있을까. 이미 아래의 1972년 10월 14일 경향신문 기사에 새로 건립한 것이라고 이미 다 쓰여있는데 이 기사 하나 들여다볼 생각이 없었을까. 

심지어 2006년 간행된 문화재청의 공식 조사보고서인 "홍파동 홍난파 가옥 외 8개소 등록문화재 조사보고서"에서도 당시까지 거주하던 소유자 김재철 옹의 증언을 빌려 1972년에 집을 다시 지을때 옛 집의 목재 일부를 재사용한 것을 빼고는 원형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했는데 말이다. 결국 2008년에 가서야 이 집의 지정명칭을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로 바꾸었지만, 애초에 그럴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확실히 고증을 해서 등록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집이 아니라 집터를 문화재 지정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 유허지 개념도 아니고. 게다가 이미 한번 잘못 알려진 사실은 끝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2010년에도 이 곳에서 이런 행사가 열렸다.


만들어진 전통이 먼데 있는게 아니다.


이것 외에도 실제로 근현대기에 들어와 원형을 잃고 유실되어 새로 복원되거나 다시 지어진 지정 목조문화재는 의외로 상당히 많다. 내구연한이 상대적으로 짧은 목조문화재의 숙명상 이건 어쩔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리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데 첫걸음이 될 터이다. 그런데도 이런 정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심지어는 한 나라의 문화재를 보호하고 그 가치를 드높여야할 공기관조차도 그런 정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채 잘못된 기록만 되풀이해 쓰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한 백년 쯤 지나서, 서울 남대문이 2008년에 방화로 영영 원형을 잃어버린 사건도 언급되지 않고, 후세들이 마치 이것이 조선시대부터 22세기까지 줄곧 아무런 손상 없이 그 원형을 유지한 것으로 착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90년대 이후 새로 복원된 서울 시내 고궁의 전각들 - 레플리카에 지나지 않는 것들 (Made by 신X수) - 까지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문화재 취급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덧글

  • 한단인 2011/08/02 11:34 #

    정말 만들어진 전통이군요.
  • 漁夫 2011/08/02 11:52 #

    일제시대 때 '중건'했다면(아니 그것도 뜻있는 분들이 모아 재건했건만) 중건으로 쳐주지 않는다는 개념인가 했더니 1972년이면... (하아)
  • 진성당거사 2011/08/03 11:55 #

    이광수 가옥의 경우는 아예 그 터를 갈아 엎어버리고 그 부분에 벽돌조로 반지하 구조물을 지어놓은 뒤 (집이 산비탈에 있습니다) 그 위에 다시 새 집을 지은 거니 뭐 할 말이 없지요. 집의 건평, 구조, 어느것 하나 이광수가 살던 그 집과 닮은 모습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 hyjoon 2011/08/02 12:18 #

    만들어진 전통...................(-ㅠ-)
  • 진성당거사 2011/08/03 11:51 #

    허허허허.....
  • 행인1 2011/08/02 14:23 #

    한벽루는 그야말로 폭격이라도 맞은 모양새로군요.
  • 진성당거사 2011/08/03 11:52 #

    6.25때 정말 폭격맞은 진주 촉석루나 장흥 보림사 대웅전이 알면 화냅니다. (먼산)
  • Warfare Archaeology 2011/08/02 15:56 #

    허걱!!!!!!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으음. 잘 봤습니다.

    그나저나 홍수의 힘은 무시무시하군요...
  • 키르난 2011/08/02 16:59 #

    Made by 신.....라기보다는 Directed by(...)라고 하는 쪽이 맞을겁니다.(먼산)
  • 팬저 2011/08/02 17:28 #

    음 대단한 문화재청이네요. 이런 부분들이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쉽네요.
  • 無碍子 2011/08/03 10:35 #

    유적은 중수나 개건했을 때 그 이력도 같이 관리하는 게 옳습니다만. 소생의 눈에는 다른게 보입니다. 눈이 이상한가요?

    무려 1922년에 수원읍의원이라는 직책이 존재 했다면 당시 읍면단위까지 의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이는데 놀랍습니다.

    읍의원 쯤 되면 친일매국노 반열에 올려야 하는데 차재윤이라는 분을 본다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1932년 동아일보가 주축이 되어 아산현충사를 중수한 적도 있긴 있군요.


  • 진성당거사 2011/08/03 11:47 #

    제 논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에 주목하신 모양입니다.

    말씀하신 일제강점기 읍의원 제도는 대략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전국의 몇몇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실제로 명목에 맞는 지방자치 제도가 제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보다는 사실 일종의 감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나마 대개 읍의원 가운데에는 일본인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이구요. 이 기사에 소개된 차재윤이라는 분은 본래 수원 지역의 유지로, 당시 다른 기록을 보면 수원 화성학원 이사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읍의원이라고 전부 다 친일매국노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위험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건 성급한 일반화가 아닐까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아닌 우리의 손으로 곳곳에서 벌어진 유적 중수사업의 경우, 퍽이나 산발적이라서 그것에 어떤 구심점이나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의 아산 현충사 중수 운동의 경우, 처음에 여운형이 주축이 되어 기금마련 운동에 가깝게 이루어진 것이 보다 확장된 경우지요. 또 1931년에 역시 동아일보가 주축이 되어 평양의 단군릉을 수축한 적도 있는데, 이 경우는 명백한 친일 활동이 있는 사람들이 기성회를 조직하고 시작한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좀더 깊게 공부를 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 들꽃향기 2011/08/03 11:44 #

    문화재 관련해서 진성당거사님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갈 수 있는 문화재 엉터리 복원은 드문 것 같군요. ㄷㄷ 만들어진 전통 표현구에서 다시 한번 격뿜을.....ㄷㄷ
  • 진성당거사 2011/08/03 11:51 #

    사실 제가 눈이 예리하지는 않습니다....ㄷㄷ 이런 것은 그냥 봐도 너무 뻔한 사실인데 얘기가 없으니 말도 안 될 뿐이지요.
  • 2011/08/10 10:2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8/10 12:2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措大 2011/08/10 16:51 #

    오늘도 재미있는 토픽을 잘 풀어주신 글 읽었습니다. 근간에 태풍으로 제주 성읍민속촌에서는 일관헌이 변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지역 사회에서는 꽤 떠들썩한 이슈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일관헌이라는 건물이 동헌으로 조선시대 관아의 일반적인 모습과 유사하냐고 한다면 뭔가 굉장히 구리구리해서... 분명히 일제시대까지는 읍사무소 내지는 면사무소의 일부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니 실질적으로는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것이 분명할텐데. 그렇다면 중건이든 보수든 이번에 새로 지을 때는 그 모양을 조선 당시의 모습으로는 돌려놔야 하지 않을까요? 일관헌에 대해서 뭔가 아시는게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 진성당거사 2011/08/10 17:08 #

    1977년에 문화재관리국이 편찬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일관헌 터"로 나와있고, 원래의 일관헌 건물은 4.3.사건때 소실되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 후 그 터에 1950년대에 겨우 가건물 비슷하게 건물을 지었다가, 그것을 헐어내고 1975년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이 책이 사실 세부적인 내용이 꽤나 엉망인지라 그렇게 신용할 만한 자료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약간 찜찜합니다. 한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니 1984년까지도 "몇년 전 복원된 일관헌"이라고 썼구요. 자료가 별로 없어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보기에 이 건물은 근년, 즉 1975년 전후에 새로 복원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제주도의 고건축으로 과거의 사진이 남은 것은 관덕정이나 구 제주목 관아 정도라서, 일관헌을 복원하는 데 어떤 특별한 고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전에 소개한 마개조 관아 리스트에 오른 건물들의 절대 다수도 사진 한장 없이 추정만 가지고 복원한 것이 태반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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