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사무소로 배달된 문화재청 홍보지, "월간 문화재사랑"을 봤습니다. 늘상 그래왔듯 이번달 호에도 사소한 디테일의 오류와 이것저것 그닥 맘에 들지 않는 기사들이 보이더군요. 뭐, 학술지가 아닌 관영 홍보용 잡지니까, 그럴수야 있겠습니다만. 헌데, 갑자기 정신이 확 아득해지는 광고란이 있더군요. 이렇게 생긴 광고란입니다.


저는 모든 문화재를 시간이 멈춘 박제화된 상태로 보존하는 것에는 절대 찬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재들보다 가장 보존이 힘들고 한번 훼손되면 원상 복구가 어려운 것이 목조건축문화재입니다. 더구나, 목조건축 중에서도 다른 건물도 아닌 궁궐 전각을 회의 장소 등등으로 사용하겠다는 건 결코 멀쩡한 생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일단 이 광고에서 언급된 궁궐 전각 아홉 채는 현존하고 있는 궁궐 전각들 중에서도 그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다른 건물들보다 월등하게 높은 건물입니다. 자경전, 통명전은 그 가운데서도 보물로 지정된 지정문화재입니다. "회의실, 교육장, 모임이나 회합을 위한 소규모 행사장" 으로 사용하는 와중에 "문화재의 보존에 지장이 없고 궁궐의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겁니다.
당장 딱 까놓고 얘기해서, 한번 예를 들어보지요. 경복궁 자경전이나 수정전 같은 건물에서 대략 10여명 정도의 인원이 프리젠테이션을 겸한 회의를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일단 두 건물은 꽤나 크기가 큰 건물이고, 아무리 햇볕과 자연광이 잘 드는 남향 집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회의 참여인원에게 충분할 만큼의 조명이나 온기를 주기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당연히 전기로 된 시설이 필요할 겁니다. 전열기구는 또 몰라도, 최소한 입식 스탠드 몇 개 쯤은 필요하겠지요. 게다가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는 중에도 전기를 사용하는 물건들, 가령 노트북이나 빔 프로젝터 등등의 전원을 연결해야 하겠구요.
자경전이나 수정전에는 전기시설이 현재로서는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전기 코드 등등을 이용해서 외부로부터 전기를 끌어와야 할 겁니다. 한데, 잘 알고 계시듯, 외부 전기시설은 누전이나 화재의 위험이 실내 배선보다는 훨씬 높지요.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만약 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는 날에는 순식간에 화재로 이어져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경복궁이 그렇게 화재에 방비가 잘 된 곳이기나 했던가요. 그 드넓은 경내 전체에 고작해야 소화전/소화기 합쳐서 100여개고, 화재감지기 하나 제대로 설치된 곳이 없지요.
뭐, 하기사, 문화재청에서는 몇 해 전에도 궁능 경내에서 청장 명의로 아무렇지도 않게 버너를 반입해서 고기를 구워드시고 온갖 취사활동을 하셨으니, 이런식의 "활용"이야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뭐, 따지고 보면 1980년대까지도 궁궐 전각들을 임의로 개조해 관리사무소나 사무실로 썼던 시절도 있으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실 수 있지요. 하지만, 문화재는 "선조들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물려받은 옛날 물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이런 문화재들을 후손들에게 고이 간직해줬다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문화재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는거 잘 알고 계실겁니다.
만약 일본 정부의 누군가가 히메지 성의 천수각에서 서바이벌 체험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중국 정부의 누군가가 자금성을 고급 호텔로 개조하자는 말을 꺼낸다면, 국제적으로 무슨 생각들을 할까요? 아마 "저놈들이 돈독이 올라서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군" 하겠지요. 제 별볼일 없는 안목으로는, 궁궐 전각을 고급 회의장 (*토즈/미플 등등의 공간에서 청구하는 시간당 이용료와 비교해보면 시간 당 36만원은 좀 과한것 같아 보입니다.) 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런 아이디어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부디 문화재청의 누군가께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별 재량도, 학문적 소양이랄까 능력이랄까 하는것도 그닥 많지 않은 일개 사학과 휴학생의 넋두리이지만요.
덧글
종중회의라고ㅋㅋㅋㅋ
실상 동네 이장님들끼리 올해 우리동네에서 이랬네 저랬네 목청높여 회의자료 읽다 오는것과 다름 없지요ㅎㅎ 그런회의라면 솔직히 상관없겠습니다만...ㅎㅎㅎ 과연 그리불빛도 전기도 필요없는 회의가 저기에서 할 가치가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