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공개!) 일제강점기 국어학자 이극로 선생의 1928년 육성녹음 by 진성당거사

*저같은 보잘것없는 천학이 감히 "최초"를 함부로 운운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본 자료가 국내외의 대중은 물론이거니와 학계에도 소개되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최초공개"라고 붙이겠습니다.

오늘 간만에 이전에 본 블로그에 소개한 프랑스 국립도서관 웹사이트 데이터베이스를 들렸습니다. 얼마전 새로 대규모 업데이트가 이루어졌다는 알림 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만, 그 동안에는 시간이 없어 찬찬히 살펴보지를 못했지요. 새로 업데이트된 대규모의 자료들 가운데, 저는 제 취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전부터 디지털화된 옛 음향자료들을 가장 관심있게 살펴보곤 합니다.

그런데 웬걸, 엄청난 음반이 두 개 새로 소개되어 있더군요. 바로 일제강점기의 저명한 학자로 조선어학회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월북해 북한의 고위 공직을 역임했던 탓에 남한에서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린, 고루 이극로 (李克魯) 선생의 1928년 육성녹음이었습니다. 이걸 맞닥뜨린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고루 이극로 선생 (1893? ~ 1978)

곧바로 확인을 해봤습니다. 

이극로 선생의 육성은 레코드 총 2장, 3면 (양면반 1장, 단면반 1장)에 걸쳐 녹음되어 있습니다. 이 녹음들은 프랑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브뤼노 (Ferdinand Brunot)가 소르본 대학에 설립한 "구술 아카이브 (Archives de la Parole)"에서 취입한 것입니다. 소르본 대학 구술아카이브는 설립때인 1911년부터 1938년까지 프랑스 파테 프레즈 (Pathé Frères) 축음기회사의 협력을 통해, 각국의 언어와 방언, 민담, 설화, 노래 등등을 "연구자의 실수나 주관 등의 개입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자료보존기관으로, 현재까지도 당시 취입된 세계 각국의 음향자료 약 600,000여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본 웹사이트의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에는 녹음 당시의 기초 조사사항을 기록한 원본 기록표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공개되어 있는데, 아래는 이극로 선생이 자필로 기록한 녹음 기록표 내용입니다. 

(*본 자료를 비롯해 이하에 소개할 음향/사진자료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의 소유입니다. 저는 이들 자료에 대해 어떠한 법적 권리도 없습니다. 혹여 문제가 될 경우에는 자료를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을 통해, 이극로 선생이 1928년 5월 15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있던 구술 아카이브의 스튜디오에서 2종의 녹음을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상 정보도 매우 주목됩니다. 먼저 선생은 이름을 "Li Kolu", 즉 아호인, "고루"로 썼습니다. 출신지는 경남 의령군 듬실이며, 9년간 중국에 거주한 후 다시 6년간 독일에 머물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직업은 "Linguiste", 즉 "언어학자"로 기재하였습니다. 또한 주로 한국어 남동 방언을 구사한다(*아마 선생의 출신지인 경상도 방언을 뜻할 듯 합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첫번째 페이지에 이극로 선생이 당시의 나이를 32세로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1928년 당시 32세라면 1895년 또는 1896년 생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극로 선생의 출생시기 (1893년)과는 2~3년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동아일보 1928년 10월 28일자의 보도에서는 선생의 나이를 "고국을 떠나던 1912년에 17살"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많은 고증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 쪽의 하단에 당당하게 쓰여 있는 이극로 선생의 한글 서명이 이채롭기도 하고, 또한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극로 선생의 서명 옆에는 1928년 당시 소르본 구술아카이브의 책임자였던 위베르 페르노 (Hubert Pernot, 1870 - 1946)의 서명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녹음의 내용을 기록을 토대로 번역하면, "신과 인간 - 천도교리 낭독", "주요한의 시, Les Enfant Vivent 낭독",그리고 "한글 자모 소개" 입니다. 주요한의 시 작품 가운데 "Les Enfant Vivent", 즉 "어린이 살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것은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강호제현분들의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는 현존하는 레코드에는 정작 기록표에 쓰여있는 주요한의 시 낭독이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천도교리 낭독" 녹음이 두번째 레코드와는 다르게 단면 음반으로 제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레코드의 원본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순전히 추측일 뿐입니다만, 이들 음반이 파테 프레즈 축음기 회사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할 듯 합니다. 

파테 프레즈 축음기 회사는 다른 음반사와는 달리 마스터 레코딩을 거대한 왁스 실린더 음반에 녹음한 뒤, 이것을 두 개의 철침이 연결된 팬터그래프 장치로 기계적인 전사를 해 프레싱 용 원반을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드러운 왁스 실린더 원반의 표면이 전사과정 도중에 깎여 나가거나 손상되어 실제로 원반에 전사되지 못한채 폐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의 파테 음반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마스터 실린더 음반에는 녹음되었지만, 실제로는 발매되지 않아 영영 사라져버린 녹음이 적지 않은데, 문제의 주요한 시 낭독도 아마 이 제작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음반을 직접 들어보면, 일종의 금속성 잡음이 고음부에서 꽤 심하게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당대 전사방식으로 제조된 파테 음반의 음색과 매우 유사합니다.


(참고자료)

파테 축음기사의 음반 생산라인에서 실린더 원반을 디스크로 전사하는 작업을 담은 사진(위)과,
파테 축음기사의 음반 전사장치 모식도 (아래)


이제, 레코드의 사진과 음원 링크를 각각 첨부합니다. 음원은 감상만 가능하고, 혹여 저작권 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다운로드는 할수 없도록 했습니다.


1. "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 (1부)

한글의 창제 내력, 그리고 한국어의 자모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녹음입니다. 이극로 선생의 국어학자로서의 면모를 잠깐이나마 느낄수 있는 재미난 녹음이라 하겠습니다.



2. "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 (2부)


앞 녹음에 이어서 조선 말소리의 용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천도교리 낭독"



제목 그대로 천도교의 교리서를 낭독한 녹음입니다. 이극로 선생은 결혼식을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 중앙교당에서 올렸을 정도로 유명한 천도교 신자였습니다. 책으로도 찾기 어려운 천도교 교리서의 단편을 듣는 것도 꽤 흥미롭습니다. 이런 책을 한국어 낭독의 예시로 사용한 것도 꽤 의외입니다만,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923년의 또 다른 한국어 낭독 녹음에서는 "Li Tsing Sieh"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지금은 거의 다 잊혀진 소파 방정환의 연재소설 "은파리"의 한 대목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 프랑스에 체류하던 한국인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한국어 서적을 아무것이나 골라 내어 읽다보니 생겨난 현상일 듯 합니다.  

강호제현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기대합니다.

덧글

  • 칼라이레 2011/10/27 21:07 #

    상당히 상태가 좋은 녹음에다 이극로 선생이 국어학자이셔서인지 또랑또랑하고 명징한 발음이 듣기 편합니다.
    이런 귀한 자료를 발굴해 주신데다 많은 자료들과 함께 쉽게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10/27 23:48 #

    음... 특이한 자료네요. 잘 들었습니다. (응?)
  • 누군가의친구 2011/10/27 23:51 #

    오호!!! 이런 자료를 찾아내시다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 耿君 2011/10/28 00:35 #

    아 이런 것이 있었군요. 잘 보고 듣고 갑니다.
  • 萬古獨龍 2011/10/28 00:55 #

    귀한 자료로군요. 잘 듣고갑니다.
  • 역사관심 2011/10/28 06:57 #

    아, 이거 진짜 크네요. 좋은 발견입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 구술아카이브가 60만점의 구술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니 (근대의), 이건 우리나라 '한국 디지털 도서관'측과 협력아래, NDL(한국측) 서비스에 들어가면 좋겠는데...
    음, 정말 장한 일 하셨습니다.
  • 역사관심 2011/10/28 07:06 #

    천도교리를 듣고 있자니, 현재 한국개신교에서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 많이 나오는군요. 참..
    이극로 선생에 대해 알아보니 작년기사가 있군요.
    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74888&sid=E&tid=0
  • 크핫군 2011/10/28 21:45 #

    헐;;; 이런게 있었습니까?
  • 迪倫 2011/10/30 09:35 #

    잘 배우고 들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서부경남 액센트를 제대로 들었습니다.
  • 자유로픈 2011/12/15 23:28 #

    top100블로그들 둘러보다가 들렀습니다. 귀한 자료들 발굴해서 소개해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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