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술서의 요상한 발번역.... by 진성당거사

지난 달 초, 주말을 기해 모처럼 학교 도서관에 들러서, 신착도서 코너를 쭉 둘러봤습니다.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유네스코 산하 국제문화재보존복구연구센터 (ICCROM)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스웨덴 학자 유카 요킬레토 (Jukka Jokilehto)의 책, "건축유산 보존의 역사 (History of Architectural Conservation)"의 국내 번역본이었습니다. 이 책이 국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을 처음 들었기에, 은근히 반가웠지요.

이 책은 1986년 처음 발표된 이래 여러차례 개정판이 나오면서, 세계 각지의 건축문화재 보존에 대한 전반적인 원칙과 규범을 제시한 획기적인 책이라 명실상부히 이쪽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저는 ICCROM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져있는 이 책의 1판을 PDF로 다운받아 일전부터 잘 읽고 있었습니다만, 어쨌든, 신착도서 칸에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최근에 나온 책인 것은 분명했고, 제가 갖고 있지 않은 2003년 최종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었기에 (*국내 간행은 2009년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많이 기대를 하며 책을 빌려서 집에 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역자의 지적 수준을 의심케 하는 해괴망측한 비문 투성이 문장과, 앞뒤도 안맞고 교정도 안본 것이 틀림없는 오탈자가  가득하더군요.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 증상은 더더욱 심각해졌구요.

그래서, 이 책을 접하시게 될 분들이 있다면 일단은 무조건 피하고 보시라는 의미로, 이 책의 하고많은 해괴한 번역 중 그나마 상태가 조금 나은 것들 몇가지만 걸작으로 소개합니다. 원서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ICCROM 공식 웹사이트에 올려진 1판 링크를 여기 걸어드리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일단은 그냥저냥 멀쩡해보이는 표지.

역자 소개.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알가디의 흑색 대리석 안에서 잠자는 인물상"이라굽쇼? 
원문은 이렇습니다. "Similarly, He identified a sleeping figure in black marble by Algardi as antique."
그리고, "최량"의 출판물이라는 표현은 우리말에서 그렇게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요. 

이건 마치.........

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왈도


아니, 주석은 왜 번역하지 않은겁니까? 


"'깔끔히 정돈된 외관'을 탄식하면서 고대 예술작품의 파괴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간 부분이 뚝 잘려나간 괴악한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용문도 괴상하기는 마찬가지. 문장 중간에 갑자기 작은따옴표 한 짝만 딸랑 들어있는가 하면, "빈상하게"라는 역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도 쓰고 있지요. 

원문과 대조해보면, 원문에는 잉글필드가 했던 말도 고스란히 인용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몽땅 다 쳐내고 제멋대로 요약해 (*그것도 똑바르게 요약한 것이 아닙니다!) 잘라버렸습니다. 어쨌든, 문제의 인용구 부분만 다시 인용합니다.

"When I hear that gravel walk is to be substituted for the Galilee, when I know that the areas round other Cathedrals have been reduced to the same insipid state of trim neatness, a sort of ludicrous indignation fills my mind. I should not wonder if I saw the Knights, recumbent on the Tombs within, dressed out in silk stockings and neat buckles. Surely the turf 'heaving in many a mouldering heap', Nay even the thistles and nettles that flourish with melancholy Luxuriance amongst the ashes of past generations, accord better with the grey walls of the stately pile, which rises amidst them, than this poorly shaven substitute, which gives no idea beyond a Tea Garden and Bowling Green."   
이 문장 어디에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나요? 원문이 약간 번잡하다는 거야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문장을 망가뜨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완성된 시절에는 내부가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일단 완성된 후에는 자의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건 무슨 말인가요? 게다가 이 사진은 원문에는 있지도 않습니다. (Google Book에서 볼 수 있는 2003년 개정판에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것과 전혀 똑같이" 


"유카단"과 "우슈말"이라. 이건 분명히 일본어 발음을 다시 옮긴 냄새가 납니다. 
보다 정확한 우리말 표기법에 따른 발음은 "유카탄 (Yucatan)"과 "욱스말 (Uxmal)"이니까요.
"욱스말"의 경우 바로 아랫줄에서는 또 똑바로 썼습니다.
아무래도 일본어 번역본을 보고 중역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 관련 항목이 나오자 원문에도 없는 한자를 잔뜩 병렬하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타지마할 왕조의 영묘"
"타지마할 왕조의 영묘"
"타지마할 왕조의 영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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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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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타지마할이 왕조 이름인줄로 아는 분이 지금 국내 대학교에 출강중이시라고요?!
게다가 문화재청 전문위원이라구요?!

그저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책이 오래되기나 했으면 또 모를까, 고작 3년 전에 나온 번역입니다.
80년대까지야 일본어 중역이든, 번역 수준이 아무리 엉터리였던들 감지덕지였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아니지요.
가뜩이나 제 값어치도 못하는 책에 3만원을 내라니요.


이런 엉망인 책을 보고 참조하고 보존보호 정책에 써먹어야 하는 실무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가뜩이나 고작 며칠 전에 문화재청은 ICCROM과 교류협력 약정 (기사링크)도 체결했지요.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이렇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ICCROM 내 우리나라의 입지를 강화하고, 문화재 보존분야에서 아·태지역 내 영향력 확산과 함께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아시아권 문화재 보존과학 국제연수(ACPCS) 프로그램과의 연계를 통한 시너지 효과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려면 일단 이런 책을 보고 참조하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덧글

  • ghistory 2012/05/22 16:35 #

    1.

    저런 사람이 무려 문화재청 전문위원이라니!

    2.

    영어실력이 자신이 없어서 일본어 번역 판본을 중역하였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2/05/22 18:38 #

    1. 그러게나 말입니다.

    2. 밑에 다른 분이 지적하셨듯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조금 의심이 갑니다. 한데 일본어 번역본이 진짜 발번역이 아니었던들, 그걸 그대로 번역했다면 또 이런 괴악한 것이 나올리 없는데 말입니다.
  • 아무것도없어서죄송 2012/05/22 17:01 #

    편집자가 미쳤군요.
    그리고 애당초 일본 대학 나온 사람에게 맡긴 것 부터가 잘못.
    인간이라면 자기에게 자신있는 언어를 선호하기 마련이죠.
  • 배길수 2012/05/22 18:28 #

    근데 서양물좀 먹었다 싶으면 이번엔 또 corn이랑 maize랑 구별을 못해요

    ??
  • 셔먼 2012/05/22 17:05 #

    Aㅏ......마지막의 타지마할 드립에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2/05/22 17:06 #

    허허... 중역이라도 똑바로 하면 나으련만 그나마도 저모양이니...ㅡㅡ;;
  • 엘레시엘 2012/05/22 17:07 #

    역자부터가 일본에서 계속 있던 양반이군요. 중역 확정인 듯(..)
  • 로자노프 2012/05/22 17:17 #

    OTL.... 타지마할에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 한단인 2012/05/22 17:32 #

    왈도체나 중역은 뭐 그렇다 치고...

    타지마할...으엌...
  • 푸른화염 2012/05/22 17:36 #

    이게 그때 보여주신 그거군요. ㅎㅎㅎ 어휴... 거기서 보았던 충격과 공포는 오늘보아도 다름이 없습니다. ㄷㄷㄷ
  • 놀자판대장 2012/05/22 17:38 #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과 역사> vs <이기적 유전자>
  • ghistory 2012/05/22 17:43 #

    3.

    '포트 윌리엄 제독':

    1) 포트 윌리엄은 콜카타(캘커타)에서 잉글랜드동인도회사와 그 후신인 브리튼동인도회사(영국동인도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주요 거점의 명칭인데, '포트 윌리엄 제독' 이라는 번역은 아무래도 이 기업의 최고핵임자=곧 해당 기업의 인디아아대륙에서의 최고책임자=잉글랜드와 이후의 브리튼(영국)이 파견한 총독을 지칭하는 표현의 오역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포트 윌리엄' 을 인명이라고 착각하였다는 의심이 듭니다.
    2) http://en.wikipedia.org/wiki/Fort_William,_India 참조.
  • 진성당거사 2012/05/22 18:22 #

    아, 그 얘기를 썼어야 하는데 빠뜨렸군요. 말씀하신 지적대로입니다. 그 밖에 이 책에는 "커널 제임스" 처럼 번역 해놓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 Colonel이 사람 이름인 줄 아는 듯 합니다.
  • 배길수 2012/05/22 17:47 #

    유독 이 책 뿐만 아니라 이따위 개(犬)역이 교수니 박사니 하는 직함 달고 흘러 넘치도록 난무하는 게 현실입니다.
    구라까지 말든가 사표를 쓰든가 하세요 박사님들
  • rumic71 2012/05/22 17:58 #

    중역이나마 충실히 했으면 타지마할 왕조 소리는 안 나왔을 터인데...
  • Lancer 2012/05/22 18:01 #

    첫눈에 반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라는 책은 진짜로 왈도체의 향연. 개인적으로 그책을 보고 지방 사립대 교수들의 양심이 의심가기 시작했음(....)

    오죽하면 교수들이 수업용으로 영문 원서로 보라고하는지...
  • ghistory 2012/05/22 18:19 #

    Lander/

    더 유감스럽게도 오역은 '지방 사립대 교수들' 만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수도권 명문대 교수들' 도 오역은 거리낌없이 저지릅니다. 그나마 오역은 양반이고, 아직도 제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번역을 강요하고서는 그 성과를 자신의 명의로 발표하는 작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2/05/22 18:26 #

    ghistory / 최근에 살펴본 이것보다 더 괴악한 번역서가 하나 또 있는데 조만간 또 소개할 생각입니다. 그 책 번역자는 인하대 교수라 하지만, 이게 과연 교수 직함 달고 있는 사람의 문장력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Lancer 2012/05/22 18:28 #

    지방대 교수들만 저지르지 않는다는건 아는데 그건 정도가 좀 심해서요...문장이 이해가 안되는게 아니라 문법 자체가 맞지않는 경우도 마구 나오는데 이거 번역기의 스멜이...
  • ghistory 2012/05/22 19:40 #

    Lancer/

    지역 차이보다는 개인의 실려과 양심의 차이가 더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 Bluegazer 2012/05/22 18:44 #

    일본어로는 욱스말(Uxmal)을 우슈마르(ウシュマル)라고 표기하는 걸 보니 일본판 중역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2/05/22 18:49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 Clockoon 2012/05/22 18:55 #

    주석을 원문 그대로 쓰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저 경우는 좀 다르지요.
    올려주신 본문을 훑어보니 대응되는 일본어 문장이 자동으로 떠오르네요. 일본어판 중역이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당연히 그것과 전혀 똑같이"는 それとは全く同じ를 번역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全く가 '완전히'로도 번역이 되지만 '전혀'로도 번역이 되거든요.

    일본어 중역은 80년대나 하던 관행으로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다는게 충격적이군요.
  • MessageOnly 2012/05/22 19:07 #

    타지마할!
  • hyjoon 2012/05/22 19:23 #

    지난번에 보여주신 그 물건이군요. 타지마할 왕조..............ㅡㅡ;;;
  • 별빛나래 2012/05/22 19:36 #

    그냥 답답할 뿐이지요.....
  • bluexmas 2012/05/22 20:15 #

    기문당이 아직도 책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건축 이론서들을 저작권에 무관(?)하게 발번역하기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 KAZAMA 2012/05/22 20:55 #

    왈도다 왈도가 책에있어
  • 초록불 2012/05/22 21:03 #

    이런 건 대부분 교수가 직접 번역하지도 않고 원고를 찢어서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준 뒤 거둬들이는게 다반사더군요. 원생들은 돈 한 푼 안 생기는 일이니까 개발새발 번역하고...
  • 무갑 2012/05/22 21:18 #

    타지마할 왕조라니 ;;;이집트보고 피라미드 왕조(웬지 왕들이 말빨이 쎄서 호갱님들을 거느리며 물건을 파는 능력이 매우 뛰어날듯한 왕조이름;;;)라고 할 분이네요-0-;;
  • ghistory 2012/05/22 23:07 #

    무갑/

    재미있는 표현 잘 보았습니다.
  • 칼슈레이 2012/05/22 21:21 #

    왠지 알바나 연구실 학생들에게 번역을 다 맡기고 본인은 이름만 올린듯한 느낌이 솔솔나는데요 ㅎ;;
  • LVP 2012/05/23 00:04 #

    딴건 몰라도 타지마할이 왕조였구나.....이거 학회에 보고해야겠구먼...(!!!!!)
  • 은화령선 2012/05/23 00:32 #

    다행히.. 건축학과로서 좋은정보네요.
    저책 .. 기억해얒.....

    라기보다 멀게보면 우리과 선배잖아?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읭?
  • 전뇌조 2012/05/23 11:08 #

    읭? 자네도 건축학과였나.
  • 은화령선 2012/05/23 11:19 #

    넵 건축학도죠..
  • 앨런비 2012/05/23 02:26 #

    일단 한자부터 일본식 한자음이 바로 떠오르는구만요. 뭐 그래도 이정도면 번역 양호한 편입니다. 즉 본햏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
  • 행인1 2012/05/23 08:54 #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번역이로군요. 그리고 저분이 '문화재 전문위원' 타이틀도 보유하고 계시다라...;;;
  • Warfare Archaeology 2012/05/23 15:05 #

    아...내가 다 창피하다. 헉!
  • virustotal 2012/05/23 18:36 #

    오역 오타로 싸운사람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국립국어대사전에 오기문제로 국립국어원에서 싸워 고치라고 여러번 하고

    겨우하고

    청와대 민간 방문했다 대통령 이름한자도 틀려 갈구고

    한국 기록원 대통령자료 역시 갈구고

    정말로 우리나라는 그런거 관대하고

    틀린지도 지적하기 전까지 모르고

    실수할수도 있지 그걸 뭐라하면 까다로운 사람 미친사람으로 생각하니

    그냥 넘어가야죠

    제가 그렇게 개인시간 버려가며 했지만 돌아온건 아무것도 없고

    낭비죠

    탈북자가 한말이 북한은 책이 조선시대처럼 아무나 못읽고 돈생각안하고

    자료라는 생각으로 해 꼼꼼하게 해서 질은 좋다

    근데 여기 양은 좋은데 서양구전번역도 영어중역에 오타도 많고 오역도 많다고

    북한책을 구하고 싶다 말할정도죠
  • 숲속라키 2012/05/24 09:44 #

    제목 보고 바로 왈도체가 생각났습니다;;

    타지마할 왕조....흠....
    자기가 알바를 써서 번역은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이름만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요?
    저정도면 어느 정도 매끄러운 번역을 할 실력은 충분히 나올텐데요....

    욱스말이요? 리눅스는 리누슈로 읽어야 할 것 같네요.
  • 모에시아 총독 2012/05/24 15:54 #

    그냥 말이 필요없는 참상을 저질러놨군요.
  • 萬古獨龍 2012/05/26 14:07 #

    타지마할에서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습니다 ㅇㅅㅇ;;
  • 블렌디모 2012/08/22 09:57 #

    저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책은 원서로 보고 싶지만... 국어도 못하는 언어실력으로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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