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전혀 뜻밖의 산물.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전설 (Urban Legend) 이라면 단연 이른바 "선풍기 사망설" 괴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풍기 사망설은 1970년대에 처음 지상에 알려지고, 1990년대에 자주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이라, 그 근원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가정에 전기가 보급된 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웬걸, 그보다 수십년 전인 일제강점기 언론에도 이미 선풍기가 건강에 해롭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내용이 보도된 바 있다.
1932년 7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선풍기 때문에 죽었다"라는 섬뜩한 제목의 기사. 선풍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으로는 사실상 최초로 보도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사건 보도는 아니고, "술먹고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다가 그대로 죽어버린 예가 있습니다"라고 아주 짧게 써놓았다. 구체적인 사건 내용이나 어쩌다 사람이 죽었는가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다.
그 이전에도, 동아일보 지상에는 계속해서 선풍기가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가를 역설하는 기사가 여러차례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 기사가 나오기 1년 전에 쓰여진 두 편의 기사 (1931.7.2.일자 및 1931.8.12.일자) 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선풍기가 왜 건강에 해로운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이것은 1931년 7월 2일자 기사, "선풍기 쓸 때 필요한 지식". 부제목에 "아이는 이 바람 밑에 절대로 재우지 말 일"이라고 써 놓았다. 붉게 표시한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기선 (電氣扇) 옆에서 오랫동안 이 바람에 불리우고 있으면 전신이 노그라져 옵니다. 이것은 건강상 나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아이에게는 절대로 금할 물건입니다. 야간에 침실에서 선풍기를 돌리면서 잠자는 것은 매우 해롭습니다.
전신이 노그라져 온다는 것이 (원문대로라면 "록으라져옵니다") 당최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쳐서 맥이 빠진다는 뜻일텐데, 선풍기를 쐬면 그렇게 되는지는 솔직히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이것은 한달 뒤인 1931년 8월 12일자 기사, "더위를 몰아주는 선풍기도 쓸 탓 - 바람이 세면 도로 해롭다" 라는 기사다. 이 기사는 이상하게도 문장 첫머리도 아닌 글자들을 큰 활자로 박아놓았다. 아마도 당시의 관행대로, 이 기사에 세인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모양이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으로 선풍기가 건강에 어떤 해로운 점을 미치는 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이 참 순진하면서(?)도 퍽이나 이채롭다.
원래 선풍기에 발생하는 바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폭풍입니다. 바로 옆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는 것은 마치 폭풍 이는 날에 밖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국부적으로 피부의 표면에 이 바람이 부딪히면 체온을 신속히 방산시키므로 혈액순환에 이상을 일으켜 오한을 느끼게 하고 기분을 나빠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동아일보 만의 주장이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친김에 찾아본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무려 1927년에 중외일보 (中外日報)에 보도된 내용도 있었다.
1927년 7월 31일자 중외일보에 보도된, "선풍기병(病) - 신기하다는 전기 부채의 해 (害), 잘못하면 생명 위험"이라는 기사. 선풍기의 위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 자료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일 뿐 아니라, 내용도 가장 상세하다. 기사가 자그마치 5단이나 될 정도로 원체 긴 탓에 여기서는 전량을 인용하기 어렵지만, 이 기사에 따르면 선풍기는 빙빙 돌면서 진공 상태를 만들기 때문에 가까이 앉아 있던 사람에게 산소 부족으로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두통과 안면 신경마비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선풍기는 살인기계나 다름 없는 셈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선풍기를 사서 사용할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당시부터 이런 내용을 신문으로 접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풍기는 잘못 사용하면 죽는 기계라는 인상이 굳게 자리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 예로, 이로부터 몇 년 뒤인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팔봉의 장편소설 "밀림"에서도 이런 대목이 보인다. (1935.10.31. 연재분)
웬일인지 자경 어머니는 선풍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안방에는 선풍기가 없다. 누가 한 말인지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 하는 말을 듣고부터는 밤이면 어느 방에 선풍기가 돌고있나하고 돌아다니는 어수룩한 늙은이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
(*1909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조스트(Jost)표 선풍기 광고.)
걱정하지말고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립시다!
(단, 전기는 절약하면서...)
덧글
사실 지금도 저희 어머니께서는 그때 이야기때문인지 선풍기 끄고 자라고 하십니다.(혹은 전기 아끼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한국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밤에 선풍기를 켜고 자다가 죽었다는 언론 보도나 의학 논문이 단 한 건도 없다는 겁니다. 인종과 사람마다 체질이 다를지언정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법의학적/생물학적 특징이 없는한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기사를 잘 읽어주시지요. 이들 일제강점기 기사 어디에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팩트로 제시되어 나와있었나요? 첫번째 기사에 나온 선풍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대목에도 그런 예가 있다더라 수준이지 실제 보도가 진척된 내용은 아닙니다.
과학적 근거나 실사례는 하나도 없고 "그랬다대더라.."수준 이상의 인용은 없지요.
선풍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증례는 대한 민국 역사상 한번도 없었습니다...
혹시 아신다면 출처 부탁드립니다. 뉴스 찌라시 기사들은 몇번 있었지만 사건 기록을 조사해 보면 다들 다른 이유였거든요.
참고로 전 선풍기 틀고 잔지 한 20년 정도 됩니다. 아직 안죽었네요...
제트엔진급의 분사를 하면 버스가 날라갈 정도니 사람이 죽긴 죽겠군요. 날라가서 벽에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는다거나...
암튼 방에 선풍기 수십대를틀어 놨다고 해서 기압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직사로 쐰다고 해서 공기의 흐름 때문에 직접적으로 흡입할 양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풍기 앞에 입을 벌리고 있으면 흡입할수 있는 공기양이 늘어나지요...
외국에서 한국을 비웃는 용도로 선풍기 사망설이 쓰인다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묘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미묘...
설마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거 말하는걸까요... 이야! 신난다!
http://edisontinfoil.com/fans/index.htm
트랙백해놨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에도 선풍기 날개에 대고 아~하는 사람이 있었나 궁금해지네요;;;
1900년대 선풍기는 거참 특이하네요. 이러면 오히려 저기 손이나 머리카락이 끼여서 다칠 법합니다.
아, 그리고 진성당거사님. 아랍어로 써있는 SP음반이 하나 있는데, 도데체 어떤 음반인지 궁금하네요.
일단 개그림이 그려져있는데 음반의 자세한 내력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