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위에 트랙백 된 초록불님의 글에 길게 덧글을 쓰기도 썼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에 관해 포스팅을 한번 제대로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주 새 투잡을 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오늘은 어쩌다보니 저녁에라도 시간이 좀 남게 된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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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69호로 지정되어 지난 2000년 무렵부터 기탁보관되고 있는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 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미 이곳저곳 웹상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익히 알려진 그림이다.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69호
몇 가지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그림이 종두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의 형으로, 근대기 서화가 및 사진가로 유명한 백련 지운영 (1852 ~ 1935)이 신라의 명화가 솔거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같이 따라 붙어 돌아다닌다. 웹상의 시시껄렁한 자료 외에도 몇가지 출판물에서도 그런 식으로 설명해 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일단 이 그림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가? 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대종교의 신도였던 항일운동가 강우라는 인물이 황해도에서 이 그림을 가져와 그의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일단은 이 그림이 솔거의 그림이라는 설이 어디서 나왔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확인할수 있는 바로는, 이 설의 가장 이른 출처는 초록불 님이 쓰셨다시피,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권종상權鍾庠의 동사유고東史遺稿라는 책이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간사자 및 연도 미상의 고서로 분류되어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책에 붙어있는 발문에 이 책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가 있다.
이 글은 용인 지역에서 구한말 이후 활동한 문객인 심주택 (1867~?)이 정축년 상춘에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심주택의 생전에 돌아오는 정축년은 1877년과 1937년 두 가지 뿐이다. 하지만 세상 천지에 열살배기 어린애에게 책의 발문을 맡기는 일은 없으니, 결국 이 발문은 1937년에 작성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책의 제목이 "유고"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권종상이 1937년보다 이른 시기에 이 책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졸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한들, 책 자체가 1937년 이후에 발간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솔거가 단군 화상을 그렸다는 얘기가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 역시 1937년 이후라고밖에는 할 수가 없다.
좌우지간, 그렇다면, 해방 이전 국내에 단군의 모습을 그린 영정이 과연 남아있기는 했는가? 일단, 분명히 말해두자면 일제강점기에도 단군 영정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리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먼저, 동아일보가 창간 직후 제일 먼저 벌인 "문화사업" 중 하나인 단군영정 현상모집 공고를 살펴보자.

단군영정 현상모집 공고.
동아일보 1920년 4월 16일자.
공고의 앞 부분에서, "존상은 고래로 보관되었던 것을 발견하여 모사함도 양호하며"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간에 전해지던 오래된 단군 화상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전에 다른 포스팅에서 소개했다시피, 1924년 초간된 뒤 해방 이후까지 오랫동안 간행된 황의돈黃義敦의 [중등 조선역사 中等 朝鮮歷史]에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졌다는 단군 영정의 사진이 흐릿하게나마 실려있다. 이 그림의 출처나 화가,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료가 없지만, 최소한 1924년에 이 영정이 책에 실릴 정도로 익히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황의돈의 [중등 조선역사]에 수록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진 단군 영정의 사진.
위 책에 소개된 이 그림의 행방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전북 익산의 천진전에 모셔져 있는 傳 이시영 소장 단군 영정이 남한 소재의 현존하는 이본 가운데는 가장 이 사진 속 모습과 근접하지 않나 싶다.


현재 익산 천진전에 소장된 傳 이시영 소장 단군 영정 (위)과,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익산 단군영정봉성회 (아래)의 제례 모습.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른바 단군 표준영정은, 대종교 총본사에서 1946년부터 모셔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전래 내력부터 뭔가 문제가 생긴다. 대종교 측의 공식 설명이 서로 엇갈리는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1971년에 대종교 측에서 간행한 [대종교 중광 60년사]에서는, 1908년 12월 31일 일본 도쿄에서 미도 彌島 두일백 杜一白이라는 사림이 나철을 찾아와 전해줬다고 쓰여 있는 반면, 1984년에 역시 대종교 측이 간행한 [대종교 요감]에서는, 대종교 측 인사인 백남규 (白南奎, 1891 ~ 1965)의 증언이라면서, 1910년 8월에 강원도 석병산에서 왔다는 공공진인 空空眞人 고상식 高上植 이라는 100세 노인이 나철에게 '신라의 명공 솔거가 그려서 오늘까지 전해온 유일본'이라며 단군영정을 건네주었다는 말을 쓰고 있다.
이렇게만 해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 이후의 전승 과정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2000년대 이후 나오고 있는 대종교 측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나철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을 당시 부여에 살던 대종교 인사인 호석湖石 강우姜虞 라는 사람에게 넘겼고, 그 후로 이 그림이 일제강점기 내내 그의 집안에 비장되어 오다가,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지성채라는 화가가 이 그림을 저본으로 새 그림을 그리고 서울 대종교총본사에 봉안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강우의 손자인 강현구는 이 원본 단군영정을 계속 보관해왔다가 2000년대 들어서 부여박물관에 기탁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저 부여박물관 소장 단군영정은, 대종교 측이 설명하는 전승과정을 믿어본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나철이 처음 받아서 모셨던 바로 그 그림이며, 최소한 조선 말기 이전, 어쩌면 신라시대에 솔거가 그렸다는 그 그림일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개 민간에서의 영정각에서는 그림을 봉안할때 옛 그림을 새로 모사했다 하더라도 원래의 그림 역시 새 그림과 같이 모시거나 같은 사당 내부에 따로 보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만약 1946년에 그려졌다는 대종교총본사 단군영정의 저본이라면, 왜 대종교 측에서는 강우의 집안에서 이 그림을 가져오지 않았던 걸까? 위의 증언 중 어느 쪽을 믿든 간에, 나철이 직접 받아온 귀중한 그림이었다면 당연히 서울의 대종교 총본사로 다시 모셔가는 것이 당연했을텐데 말이다.
사실, 진실은 먼데 있지 않다. 위의 얘기는 사실 완벽하게 날조된 헛소리일 뿐이다.
1987년 4월 9일자 경향신문에는 이런 대서특필 기사가 실렸다.

보시다시피, 지금 부여박물관에 있는 문제의 그 그림이 "현존 최고 最古 단군 영정"으로 새로 발견되었다는 기사이다. 그냥 비슷한 그림이 아니냐 하는 소리도 할지 모르겠지만, 그림 화폭의 손상이나 찢어짐까지 위에 있는 사진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할 뿐더러 단군이 앉은 의자 부분의 디테일과 얼굴부분 표현 역시 일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사에 소개되어있는 이 단군 영정의 전승과정이 위에서 살펴본 대로의 오늘날 대종교 (및 증산도 일부 인사 등등)이 주장하는 바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문제의 그림은 87년 당시 전남 해남군 화산면에 살던 이가우라는 사람의 재당숙인 故 이종철 씨라는 사람이, 1930년대에 휘문고보 재학 시절 황해도 구월산 수학여행을 갔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허화된 구월산 삼성사에 남아있던 그림을 각종 제기祭器류와 함께 집어들고 곧장 가져온 뒤로 지금까지 보관했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한다.
부여가 아니라 전남 해남군이고,
나철이 받아모신 '솔거'의 그림이 아니라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졌던 그림이란다.
이 기사에서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의 안휘준 교수의 감정 결과도 소개되었는데, 안휘준 교수는 "의습의 굴절 표현이나 음영 표현을 볼때, 조선 말기의 화가 석지 채용신 류의 화법을 구사한 근대기 그림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개인적으로는 저 그림이 지운영의 작품이네 우쩌네 하는 소리가 나온 건 아마 이 얘기가 와전되어 돌아다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미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그림을 '발견'한 사람은 멀쩡한 사학자나 미술사학자, 심지어 대종교 계열 인물도 아니고,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재직중이던 박성수 교수를 비롯한 경향신문 취재팀이었다. 물론 박성수 교수도 사학 전공자이긴 하지만, 독립운동사 전공자라는 걸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1982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을 지내며 국사교과서 파동을 제대로 쥐고 흔들던 리즈시절의
박성수 교수 인터뷰 기사. 1982년 12월 9일 경향신문.
빨간 칸 안에 든 말은 참으로 명언(?)이 아닐수 없다.
뭐, 환단고기를 자청해서 '감수'하시는 양반이시니 어련하겠나.
이건 단순히 한번 나온 오보가 아니다.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인 1987년 4월 16일자 경향신문에 박성수 교수가 연재하던 칼럼, "박성수 교수의 단군기행"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성수 교수의 단군기행 (15) - 해남으로 옮겨온 구월산의 영정
경향신문 1982년 4월 16일자.
이 기사에서 박성수 교수는 이 그림이 진품일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참으로 당당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논변을 펼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략)....지금 적지 않은 단군 화상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오랜 역사를 입증해주는 것이라 믿어지며, 그러니까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불신론은 도리어 비과학적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단군의 얼굴에 있다. 모자나 의상이나 의자를 가지고 논하는 것은 마치 가지와 잎을 가지고 식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눈, 코, 입, 그리고 수염이 더 중요한 것이다. 단군 화상을 그리려던 화가는 모름지기 한국인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을 묘사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고, 그에 실패한 그림은 작품으로 볼 때에도 비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밖에 없다.......(후략).......
그런데 이 칼럼을 쭉 읽어보면, 소장자는 자신의 재당숙이 1930년대 휘문고보를 다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박성수 교수는 그림을 집어왔다는 소장자의 재당숙이라는 인물이 1879년 생임을 감안하면, 1930년대 휘문고보가 아니라 1900년대의 휘문의숙을 다닌 것이 맞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이미, 문제의 그림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의 그림일 가능성 자체가 와장창 무너지고 만다. 위에서 짚어봤다시피, 1924년에 간행된 책에도 구월산 삼성사에 단군 그림이 在하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장자의 증언만 믿고 얘기를 한다 쳐도, 1930년대에 구월산 삼성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누가 사당에 모신 그림이나 집기를 집어와도 모를 정도로 퇴락했다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1926년 9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대종교 측에서 구월산 삼성사를 새로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더러, 1934년, 1936년, 1939년에 쓰여진 기사들에서도 유서 깊은 황해도의 고적으로 언급되기까지 하고 있다. 대종교 측의 기록만 믿더라도 [대종교 요람]에 대종교 측이 1934년과 1938년에 제례까지 올렸다고 기록했으니, 이만저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삼성사의 중건 계획과 그 착수를 알리는
1926년 9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래도 이쯤에서도, "에이, 설마. 이건 그냥 우연의 일치로 매우 유사한 그림이 세상에 둘이나 있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야"라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것 같아, 새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공식 설명문을 다시 옮겨본다.
대종교의 신도였던 항일운동가 강우가 황해도에서 이 그림을 가져와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자, 이번에는 강우 일가가 다시 뚱딴지같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가져왔다고라. 이건 암만해도 앞에 나왔던 해남 스토리와 대종교 측이나 다른 쪽에서 새로 만들어낸 전승과정이 뒤섞여 나온 설명이라고밖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1987년에 박성수 교수가 설레발을 쳤을 때부터 2000년에 이 그림이 부여박물관에 기탁될 때까지의 13년 동안 어딘가에서 흑막과 배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확증은 없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동기를 개인적으로 추측해보았다. 나는 대종교 측 인사, 아마도 경향신문 기사에 여러차례 언급된 안호상이나 그의 주변 인물, 어쩌면 박성수 교수가 이런 날조 행각을 벌여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호상을 비롯한 대종교 측 인사들로서는, 이희승과 이병도(!) 등등이 핵심 인물로 관여하고 있던 현정회 측이 제시한 단군 영정도 자기네들이 모시는 단군영정과 함께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대우받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을 것이다. 경향신문에 소개된 안호상의 저서 [환웅과 단군과 화랑] (1981)에서도, 아닌게 아니라 식민사학자들의 무리인 현정회가 단군의 국조성상을 망가뜨렸다는 식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자, 그런데 내 포스트의 제목은, 보다시피 "단군만 그려져 있으면 다 지정문화재가 되나?" 이다. 위의 이 날조 나부랭이들을 다 차치하더라도, 이게 단군의 모습을 그린 오래된 그림인 건 어쨌든 분명한 것 아니냐 하는 식으로 얘기할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국보나 보물도 아닌, 웬만한 동네 정자 따위도 들어갈 수 있는 일개 지방문화재 급인데 뭐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는거 아니냐 하는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 그림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이다.
다시 문화재청의 공식 설명문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가로 34㎝, 세로 53㎝ 크기로, 192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초상화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며, 레이온[人造絹]에 담채(淡彩)로 그려진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레이온
레이온
레이온
레이온!!!!
지금 인조견 레이온에 그려놓은 그림을 갖다가 90년 가까이 된 문화재급 그림이라고 믿으라는거임?! 물론 레이온이라는 인조섬유가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레이온이 시판된건 1924년 무렵이고, 인조견이라는 것이 그림을 그릴 정도의 사이즈로 시중에 널리 보편화된 것은 빨라야 1930년대 이후 일.
인조견에 그린 그림이라면 인사동이나 황학동, 장한평, 동대문 풍물시장 등등에도 널리고 널리고 널린 것들인데.
그런 것이 문화재라니.......이게 무슨 소리요!
어쨌든, 일단 선동질은 여기까지.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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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흑... 레이온이라니! 할말을 잃었습니다.
팔사품도 병풍이 대단한 문화재는 아니지만, 팔사품 병풍도가 조선시대 그림이라면 거기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은 몇 안되는 조선시대 거북선 원색 이미지 자료라는 점에서 나름 일정한 가치가 있죠. 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조선 개항 이후나 일제 강점기 때 그려진 그림일거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저도 제법 실망이 컸습니다.
보다 더 유명한 충렬사본이나 국립중박본은 아니지만, 거북선 그림만 보자면 현충사 종가 소장본 팔사품 병풍이 나름 비교 우위의 의미가 있는 자료였는데 그 가치가 사라져 버리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유명인의 종가 등 나름 진품 옛날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해서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무조건 오래된 가치 있는 유물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는 가슴 아픈 교훈을 준 사건 같습니다.
팔사품도 병풍은 배접지가 양지에다 안료가 황산바륨이면 그 시기를 암만 올려잡아도 1920년대 전반이겠군요. 제가 보고 듣고 한 경험상, 일단 양지가 병풍에 쓸 만큼 큰 사이즈로 유통된 것은 어떻게 해도 1910년대 말을 넘길 수가 없으니까요. 에메랄드 그린 (화록청) 안료라면 더더군다나 1910년대까지 올라가지도 않을테구요. 이 안료가 처음 고안된 것은 1814년이고 아시아, 특히 일본에 소개된 것은 빨라야 1920년대니까요.
...케이온이라고요?